‘철없는 엄마’
‘철없는 엄마’
  • 승인 2014.08.2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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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경아
지경아 대구경동초
등학교 학부모
어린 시절 부친께서 유학 중이시어서 나는 미국의 미시건주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당시 학교에서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나는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늘 특별 대접을 받았다. 이 유일성 때문에 나는 친구들이 생일파티를 할 때에는 항상 빠뜨리지 않고 초대되는 사람이 되었고, 그래서 미국에서의 학교는 나에게 단순히 무엇을 배우는 장소라기보다는 늘 즐겁고 행복한 일이 벌어지는 곳이었다. 돌이켜 보면, 미국에서 초등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그야말로 천국에서 사는 것과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반전은 내가 한국의 초등학교로 전학 온 3학년 때부터 시작되었다. 상대적으로 국어 실력이 떨어지는 나는 학교 공부를 따라가기가 너무 벅찼고, 그래서 늘 기가 죽어 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 학교에서 가장 극복하기 힘들었던 것은 냄새나고 무서운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처음 접한 소위 ‘푸세식’ 화장실은 그 당시 어린 나에게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어서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사용하지 못했다. 결국 집에 갈 때까지 ‘쉬’를 참다가 일어나는 일과 그로 인한 학교에서의 나의 위상은 굳이 더 설명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으리라. 지금까지도 나의 머릿속에는 어머니께서 학교에서 선생님과 상담하고 돌아오신 날 딸을 걱정하시며 조심스럽게 말씀을 나누시던 부모님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고 있다.

학교에 대한 불안한 기억을 갖고 있던 내가 학부형이 되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게 되니 이제는 내 아이들에게 학교가 나의 기억과 비슷한 곳이 될까봐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학교 일이라면 열일 제쳐놓고 적극 참여하려고 노력하였고, 아이들이 학교에 잘 적응하는지에 촉각을 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이 아니라 나에게 있었다.

한번은 큰 아이의 상담일이어서 학교를 가는데 빈손으로 가기가 민망하여 제과점에서 롤케이크를 하나 사들고 갔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매우 당황해 하시며 빈손으로 오시는 것이 더 기쁘고 편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상담을 마치고 일어나는데 선생님께서는 수줍은 얼굴로 빵 봉지를 내 손에 쥐어 주시며 마음만 받으시겠다는 말씀과 함께 거듭해서 미안함의 표현을 하셨다. 나는 부끄러움과 죄송함에 빨개진 얼굴로 빵을 다시 들고 황급하게 교실을 나왔다.

내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교육열과 촌지가 항상 함께 묶여 거론되었고, 이것은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다루어지곤 하였다. 한편에서 우리는 흔히 아이들 친구 집에 놀러가도 빈손으로 가지 않고 무언가 주섬주섬 싸들고 다닌다. 나는 이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예의이고 미덕이라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미덕도 학교에서만큼은 선생님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 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예의에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학교가 예전의 내가 알고 있는 불안함의 근원이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곳이라고 느끼게 되면서 이제는 아이들 걱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다행히 우리 아이들은 나보다 조금 나은지 학교가기를 좋아하고, 학교에서 재래식 화장실은 더 이상 찾아볼 수도 없다.

결국 문제는 나에게 있었고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뒤늦게 내가 철들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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