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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달구벌아침

발밑을 살피는 일

기사전송 2018-04-16, 21:4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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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수필가


사람의 관계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백년해로를 약속했던 부부조차도 갈라서는 일이 비일비재한 현실이다. 물론 잠깐 인사만 나누었던 사람과 평생을 함께할 수도 있고, 뜻하지 않은 자리나 지면에서 잠깐 만났을 뿐인 사람과도 소중한 인연을 맺고 오래도록 이어오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는 살아가면서 운명을 바꾸어 놓을만한 사람을 과연 몇 명이나 만날 수 있을까.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시를 폐업하셨다는 시인 한 분을 알고 있다. “문학이 채워내는 과정이라면 도는 비워내는 과정이지 않을까” 라는 의문의 화두를 던지신 후, 시를 쓰지 않으신다. 또 “문학은 채우는 과정일까 비워내는 과정일까”를 반문하는 것조차 어리석음은 아닌지를 스스로에게 묻고 “게으른 것이 넘치는 것보다 나을지 답이 안 나온다”며 시작(詩作) 폐업을 선언하신 것이다. 그 당시 난 ‘등단’이란 것을 한 번 해볼까하고 마음 쓰던 때라서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살아가는 일 또한 마찬가지겠지만 글을 쓰다보면 가끔, 막다른 골목 끝에 서게 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늘 그 분이 끝으로 남기신 말씀이 떠오른다. “상관없다.”

“상관없다”는 말의 의를 더듬어보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유순하게 흐르는 강물 같은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그리스 시인이자 소설가인 카잔차키스의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그의 묘비명이 새삼 익숙하게 다가온다.

얼마 전 나는 처음으로 등단에 도전장을 던졌다. 내가 던진 문학잡지가 가장 오랜 전통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고 있다는 시인들조차 그런 잡지가 다 있느냐며 비아냥대기도 하고 젊은 사람보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훨씬 더 많은 경로당 같은 곳인데 하필 젊은 사람이 거길, 하며 말끝을 흐리기도 했다. 심지어는 검은색, 흰색 하면서 색깔론을 제기한 사람들도 몇 있었다. 도대체 무슨 근거에 초점을 두고 하는 말인지 의아했다. 잘 아니까 해 주는 조언이라는데 내겐 오히려 제대로 모르고 하는 폭언으로 들렸었다.

나는 왜 글을 쓰게 되었을까 되물어본다. 왜 쓰는가라는 질문은 왜 사는가라는 화두와 같은 맥락으로 다가온다. 삶이 그렇듯, 하고 싶은 말이 쌓이고 쌓여 입으로는 다하지 못할 것 같아 나는 글을 쓰기로 했었다. 살아갈수록 차오르는 공허감을 비워내기 위해 글을 쓴다. 뭘 해도 덜어지지 않는 내 속의 퇴적층처럼 쌓여가고 있는 거짓 욕망들을 글쓰기를 통해 비워내려 했었다. 나의 글쓰기는 살아남기 위한 나의 몸부림이며 처방전이다.

목민심서 제11부 진황(瞋荒) 6장에는 “진휼하는 일을 마칠 즈음에 처음부터 끝가지 점검하여 저지른 죄과를 하나하나 살필 것이다. 사람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세 가지니, 민, 하늘, 그리고 자기 마음이다. 뜻은 성실하지 못함이 있으며, 마음은 바르지 못함이 있다. (...) 이 세 가지에 속임이 없으면 나의 진휼하는 일이 거의 허물이 적을 것이다” 했다. 나는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자기 마음’이라고 이해했다. 글은 역동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나 동시에 글을 잘못 쓰면 폭력이 된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말로 짓는 원한은 백년을 가고, 글로 짓는 원한은 만년을 간다”고 한다.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법이다. 생사대사(生死大事)의 해결도 조고각하(照顧脚下)에 달려 있다고 하니, 내 발 밑을 먼저 살피는 심정으로 글을 읽고 써야겠다. 혹 나의 글이 그 누구에게는 상처가 되고 슬픔이 될까. 늘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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