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鄭道傳)의 나라
정도전(鄭道傳)의 나라
  • 승인 2014.01.14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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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삼
전 언론인
새해부터 KBS가 대하드라마 ‘정도전’을 방영하고있다.

‘하필이면 정도전이 이 시대 화두의 주인공인가’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도전은 조선왕조를 세우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정치가, 신진 유학자로서 조선사회에 성리학(性理學)을 정착, 국교화하는데 기여하였다.

조선개국 이전의 고려조정은 부패하고 민생은 도탄에 허덕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백성들 사이에는 새로운 나라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라 도선대사 도참설의 핵심인 ‘십팔자위왕설(十八子爲王說)’이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었다. 정도전도 중국대륙에서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가 쇠퇴일로에 있고, 주원장이 한족(漢族)을 규합하여 명나라를 세워 신흥국가로 발전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건국이념으로 새로운 왕조(王朝)를 세우려는 야심을 키워갔다.

도참설과 명나라 왕조건국은 “하늘의 뜻을 어기는 군주(君主)는 몰아내야한다”는 맹자의 혁명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어느날 정도전이 조정으로부터 원나라 사신을 접대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거부하다가 파직당하여 나주목 회진현에 유배되어 풀려나 4년간 칩거하면서 1384년(우왕 10년) 함흥 변방을 지키고 있는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李成桂)를 찾아가 환담을 나누고, 그의 인물됨됨이를 관찰하고 돌아가면서 막사 앞에 있는 큰 소나무의 껍질 속에 시 한 수를 써서 끼워놓았다.

‘아득한 세월 속에 한 그루 소나무여/ 청산에 나고자라 몇 만 겹인가/ 언제 우린 다시 볼 수 있을까/살아가는 동안 높이 보고 따르리!’

이 시는 정도전이 마음 속으로 이성계 당신을 새로운 나라의 주군(主君)으로 삼겠다는 뜻을 표방한 것으로서, 용비어천가에서도 정도전은 이미 이때 천명(天命)의 소재를 알고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정도전은 이성계가 1388년 위화도회군에 성공하자 그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이성계는 조민수와 함께 조정 실권을 장악하고 우왕을 폐위시키고 창왕을 세웠으나, 두 왕은 여러 왕후들을 둔 공민왕이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신돈의 자식이라는 세간에 떠도는 루머에 의해 임금의 자리를 물러나게 하였다. 마지막 왕 공양왕도 이방원의 사주로 1392년 4월 정몽주(鄭夢周)가 피살되자, 정도전 측 인사들이 공양왕을 퇴위시켰다.

고려왕실은 34왕 474년으로 막을 내리고 이성계가 고려왕으로 즉위하면서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고려국가의 의장과 법제를 유지하겠다고 선언하였으나 차차 새 왕조의 기틀이 갖추어지자 정도전은 국호를 명나라의 양해를 얻어 조선(朝鮮)으로 고치고 한양(漢陽)으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마침내, 정도전이 꿈꿔온 조선왕조는 이성계를 앞세워 성리학(性理學)을 통치이념으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구현을 목적으로 하고, 명나라와 사대교린정책(交隣政策)을 목표로 하는 새왕조가 실현된 것이다.

이때부터 정도전의 야망이 급물살을 타고 정치력을 발휘해 나간다.

그가 살아있을 때 한 말이 전해지고 있다. “한(漢)나라 고조 유방이 장자방 장량을 발탁하여 한나라를 창업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장량이 유방에게 왕위를 열어주었다”고 했다. 이 말은 정도전 자신이 이성계를 앞세워 易姓革命으로 조선을 개국했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자신의 의도대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확립하고 나라 이름은 물론이고, 漢陽으로 도읍지를 옮겨 곳곳에 있는 궁궐 전각 대부분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 경복궁을 둘러보면 조선은 정도전이 꿈꿔온 이상적인 정치실현의 장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1394년(태조 3년) 조선왕조의 개국이념과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민생혁명사상 등이 나타나 있는 헌장법전(憲章法典) ‘조선경국전’을 저술하여 훗날 ‘경국대전’을 비롯한 조선왕조 법전편찬의 기초가 되었다. 태종도 1398년 제1차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제거된 후, 조선경국전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정도전은 또다른 저술들을 통해 국가하부조직개혁과 왕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히고, 숭유억불정책의 이론서 등도 편찬하였다.

이와같이 정도전은 조선개국을 이끌었던 조선개국 설계자, 혁명가였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변절자 또는 모사가(謨事家)로 폄하되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러한 정도전의 인물평은 왕자들의 정권찬탈을 미화시키려는 조선왕조의 의도적인 매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정도전이 부패한 고려를 易姓革命으로 개혁하여 맹자의 민본사상을 실현시키려고 했던 혁명가의 정신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정도전의 민본혁명사상은 민주정치에서 국민의 주권이 표로 표출되어 위정자(爲政者)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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