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
  • 승인 2014.04.28 17:3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효진
스피치 컨설턴트
일제 강점기에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에 갇혀 고초를 겪었다. 그 가운데 독립운동에 참여한 일이 없는데도 잘못 잡혀 온 사람이 한명 끼여 있었다. 그는 자신이 옥에 갇히게 된 일이 억울하다면서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때 독립운동가 한 사람이 그에게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아무 일도 안했다는 것만으로도 벌 받아 마땅하다. 수많은 동포가 무참하게 피를 흘렸고 조국이 엄청난 굴욕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데도, 당신은 어떻게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단 말인가?” 억울함을 호소하던 그 사람은 아무 말도 못한 채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한 남자의 경우를 보자. 그는 어느 날 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다리 위에서 난간에 기대어 슬피 울고 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된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 여자가 슬픔과 고민으로 곧 강물에 뛰어들려고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여인을 구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뒤에 일어날 여러 가지 귀찮은 일이 생각나서 그냥 모른척하고 지나가 버린다. 그가 다리를 다 건넜을 때 풍덩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놀라며 모여드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그는 더 빨리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고, 그 사건은 곧 잊혀진 사건이 된다. 그러나 한참 뒤, 어느 날부터인가 그는 형편없는 사람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강물 속에서 들려오는 그 여인의 웃음 소리 때문이었다. 이 내용은 알베르 까뮈가 쓴 ‘전락’이라는 소설의 일부이다.

법적으로는 그 남자에게 자살을 기도하는 여인을 구해 주어야 할 의무가 없었지만 그의 양심은 여인을 구하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양심의 명령을 거역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전락하게 된 이유이다. 전락의 단초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데에 있었던 것이다.

이 두 사례에 등장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죄. 즉,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고 도와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죄, 바로 태만죄 또는 무관심죄다. 봐야 할 것에 눈 감고, 들어야 할 것에 귀 막고, 말해야 할 것에 입 닫고, 행동해야 할 땐 딴 짓을 한 죄는 훗날 예기치 않은 순간에 우리에게 책임을 묻는다.

물론 우리는 살아가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란 나 자신의 가치와 신념이 아닌 사회가 강요하는 트렌드나 경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주류를 이루는 가치에서 벗어나 내 몸과 마음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보는 것이다. 몇 가지 나열해보면 그냥 푹 쉴 권리, 사랑받으려 애쓰지 않을 권리, 사교적이지 않을 권리, 꿈 꿀 권리, 생각하지 않을 권리 등이 그런 것들이다.

시대의 유행을 쫓아가지 않으면 뒤처지고 낙오될 것처럼 위협하는 자본의 부추김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소신이 없다면 늘 불안과 초조, 불만족에 시달리며 살 수 밖에 없다. 우리를 얽매는 수많은 의무가 있기에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를 누리는 배짱이 필요하다고 어떤 이는 말한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이라고해서 무기력해지거나 나태하게 사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게으름을 피운다고 해도 사회가 강요하는 가치에 대해서 그러는 것이지 스스로에게 그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도 있다. 세월호 침몰 사고를 보면서 우리는 행하는 것뿐 아니라 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는 것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