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고수장의 고장 문경 들여다보기
산고수장의 고장 문경 들여다보기
  • 승인 2014.06.0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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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종 시인
문경은 행정구역이 경상북도에 속하지만, 결코 신라의 텃밭이 아니었다.

슬기로운 우리 국민들이 가보고 싶은 곳으로 첫 손가락을 꼽는 관광명승지가 바로 문경새재다.

내 고장 문경의 특색을 한마디로 말하면, 산고수장(山高水長)의 자연환경이 제대로 보전된 삼삼한 지역이다.

문경엔 전국적으로 이름난 명산(名山) 주흘산(主屹山 116m) · 백화산(白華山.1063m) 등 1천m가 넘는 고산이 여섯 개나 되고, 길이가 백리(40km)가 넘는 긴 하천이 둘이나 된다.

영강(潁江.66.2km)과 금천(錦川 42km)이 문경을 풍요롭게 적셔주는 젖줄이다.

문경의 주봉(主峰) 주흘산은 산 이름이 고구려식 표기라고 필자는 보고 있다. 오늘날 문경으로 불려지기까지 몇 차례 지명이 바뀌었다.

문경의 맨 처음 이름은 고사갈이(古思葛伊)였다. ‘고사갈이’가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지만, 1990년 초에 필자가 단방에 확실하게 뜻을 풀었다.

필자의 졸견에 맞서는 사람이 없었다. ‘고사갈이성’ 다음에 관산(冠山)이라 한데서, 고사갈이성의 뜻을 파악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주흘산의 모습은, 평지에서 보면 고깔같이 생겼다. ‘고사갈이’는 ‘곳갈이’의 이두식 표현이다. 곳갈이가 관산(冠山), 관문(冠文), 문희(聞喜)를 거쳐 오늘날 같은 문경(聞慶)으로 되었다.

문경에서 태어나 73세가 되도록 문경에서만 줄곳 살아온 필자가 깨친 바로는, 문경사람들은 지방색이 전혀 없다.

문경사람들은 외지에서 문경으로 이사와서 사는 사람에게 텃세를 부리는 법이 전혀 없다. 문경의 이웃 고장들은 텃세가 세서 외지사람이 파고 들어가 살기가 매우 힘들다.

문경시에는 토박이 보다 외지인들이 이사해 와서 많이 살고 있다. 문경사람들이 텃세를 부리지 않고 지역색이 없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문경은 삼국시대 때는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지배를 골고루 거친 3국 세력이 충돌하던 점이지대였다.

천년고찰 김용사나 대승사를 세운 승려들이 모두 고구려의 승려라는 사실이 신라와 고구려가 접경임을 알려준다.

문경시 마성면 신현1리에 있는 고모산성은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유물이 최근의 지표조사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삼국의 유물 중 고구려 유물의 비중이 높다.

고모산성은 북쪽에서 남쪽을 막는 성(城)의 형국이다. 고모산성은 신라가 처음 축성한 게 아니라, 백제나 고구려가 쌓았을 가능성이 크다.

유물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고모산성 밑으로는 낙동강 4대 지류의 하나인 영강(潁江)이 아름다운 자태를 보이고 있다.

전 국민이 첫손가락을 꼽는 전국 제일의 명승지 문경새재의 이름도 따져봐야 할 것 같다.

새재를 고려시대 때는 초점(草岾)이라 했다. 초점(草岾)이란 ‘억새풀 고개’란 뜻이다.

조선시대 때는 다시 초점(草岾)이 조령(鳥嶺)으로 바뀌었다. 새재(642m)란 너무 높아서, 새도 날기 어려워 ‘새재’라 부른다 하니, 하품이 날 소리다.

북한에는 2천m가 넘는 고개도 꽤나 된다. 문경새재는 고개 축에도 못 든다. 문경새재는 새(鳥)와는 관계가 없고 새(草)와 직결된다. 지금도 새재에는 풀과 관계 있는 지명이 많다.

푸실(草谷), 상초(上草), 하초(下草), 중초(中草), 초곡천(草谷川)이 있는 것만 봐도, 새재는 ‘억새풀 고개’임이 확실하다.

문경엔 경상북도 사투리가 별로 없다. 이우릿재(이화령)를 넘으면 충북 괴산 연풍이다. 문경 사람들이 이우릿재를 넘어 연풍 사람들과 왕래가 잦아 경상도 사투리가 많이 완화되어, 문경에는 경상도 사투리가 둥주리를 틀 수 없었다.

경상도 말 중에 문경 말이 서울 표준말에 가장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연구한 바로는 고구려가 문경을 지배한 것은 약 150년 간(400∼550년)이라고 추정한다.

충주에 있는 중원 고구려비(장수왕)가 5세기 초(400년경)에 세워졌고, 신라 진흥왕이 단양 적성비를 세운 것이 545년∼550년 경이다.

문경을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로는 운강 이강년(1861∼1908)선생을 내세울 수 있다. 운강 선생은 조선 고종때 무과애 급제하고 을미사변 뒤 항일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무찌르다 잡혀서 순국한 충절의 대명사 같은 어른이다.

문경의 현대인물로 예술에 뛰어난 전국단위 제1인자 두분을 잠깐 살펴보자. 백산 김정옥(白山 金正玉) 사기장은 7대째 전통도자기를 빚는 국내 최장수 도예가문이다.

백산은 한국 최초의 도자기 부문 명장(名匠)이며, 대한민국 유일의 중요문화재 105호 사기장(沙器匠)이다.

산북면 내화리가 고향인 엄태정 조각가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장을 역임하고, 한국인 최초의 세계조각학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현재도 예술원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은 관광명소로 각광 받는 문경이지만, 왕년의 문경 자화상은 한국 산업경제의 원동력 구실을 수행했다. 1980년대 무연탄을 연간 200만톤을 생산한 국내 제2의 탄광지대였다.

문경서 생산된 연간 30만톤의 시멘트는 6·25동란으로 파괴된 우리나라를 재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지난날이나 지금이나 문경은 이 땅의 보배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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