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빈말’
아빠의 ‘빈말’
  • 승인 2014.07.31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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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민 철학본색 대표
철학본색 대표
평소 존경하는 선생님과 식사할 자리가 생겼다. 선생님은 60대로 도쿄의 한 대학에서 인권을 가르치시며 여러 이유로 아이를 갖지 않으셨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이 발표하실 글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나온 대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글의 내용은 국가가 애국심을 애향심과 가족애 등과 연결시켜 국민에게 주입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가족에 대한 사랑, 고향에 대한 그리움, 국가에 대한 충성이 연결되면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폭력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가족-고향-국가에 대해 개인이 ‘분리될 수 있는 자유’가 중요하다는 취지의 글이었다. 그러나 분리의 자유는 모두가 이기주의에 빠져 공공선에 헌신하지 않아 사회가 유지되는 것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분리의 자유를 누리면서 동시에 사회를 유지해나갈 수 있을까? 나는 이 문제와 관련해 애국심이나 애향심과 다르게 가족애나 자녀에 대한 부모의 희생은 본능적인 부분이라 분리의 자유가 불가능한 것이 아닌지 선생님께 여쭸다. 또한 “부모들은 아이를 키워봤기 때문에 다른 아이가 겪는 고통에 대해서도 상상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따라서 분리될 수 없는 가족애를 바탕으로 사회를 유지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씀드렸다.

선생님께서는 예상했던 반응이라고 하시며 이런 질문을 하셨다. “자네 아이와 누구 집 아이인지 알 수 없는 아이가 동시에 며칠을 굶었다고 하세. 누구에게 남은 한 조각의 빵을 먹일 것인가?”

선생님의 질문은 자기 자식에 대한 사랑은 본능적일 수 있더라도 내 아이를 향한 사랑으로부터 ‘다른 아이’를 향한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질문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나는 과연 내 아이와 남의 아이를 똑같이 대우할 수 있을까? 무엇이 정의로운 선택일까? 내 본능을 거스르고 두 아이를 동일하게 대우하는 것일까, 아니면 본능에 따라 내 아이를 우선적으로 대우하는 것일까?

물론 아직까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를 포함한 다수의 부모들은 선생님이 우려하시는 것과는 달리 세월호 참사 이후로 국가나 정부가 나와 내 자녀를 보호해줄 수 있다고 더 이상 믿지 않는 듯 하다.

그러니까 세월호 참사는 각각의 개인을 국가와 사회로부터 분리시키는 사건이 된 셈인데, 그 때문일까? 많은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위험한 일을 만나면 “중앙의 지시를 따르라” 거나 “경찰이나 구조대가 올 때까지 기다려라”가 아닌 “누구보다 재빨리 위험에서 탈출하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이런 태도는 분명히 제 기능을 못해준 국가와 정부, 책임자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분명 내 아이와 남의 아이는 ‘동일하지 않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다른 아이가 희생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내 아이만큼은 반드시 살아 돌아와야 한다’.

가만히 있지 말고, 누구 말도 듣지 말고, 스스로 탈출할 길을 찾아라! 이것은 우리가 국민 혹은 신민이 아니라 ‘개인’이 되었다는 선언이면서 동시에 개인이 얼마나 이기적인지를 보여주는 말일 수도 있다. 남은 빵 한 조각은 내 아이의 것이어야 하기에, 우리는 아이들에게 옳은 일에 대한 헌신보다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더 중요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943년 9월 26일 로마의 유대인 거리에서 독일군에 의한 유대인 일제 체포가 시작되었다. 이때 구속된 사람 수는 1천22명. 그 중에는 자신이 보호하고 있던 장애를 가진 유대인 고아와 운명을 같이한 비유대인 여성 한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포로들은 가축용 화물차에 실려 아우슈비츠로 이송 당했다. 물도, 먹을 것도 주지 않아 이송 중 많은 사람이 사망했고 시체는 정류소에 버려졌다. 1천22명 중 생환한 사람은 고작 15명. 이 여성은 비유대인인 것을 밝히기만 하면 체포를 면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혈연도 아니고, 실리적 보답도 기대할 수 없는 장애 어린이와 죽는 운명을 함께 했다.

그녀의 행위는 이탈리아라는 국가를 위한 애국심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자기로서 가장 ‘인간답다’고 여겨지는 행위를 선택한 것이다.

내 아이를 인간답게 키우는 것은 그저 “가만히 있으라”도, 이기적으로 “누구보다 재빨리 탈출하라”도 아닌 “네가 옳다고 믿는 일을 하라” 혹은 “한 사람이라도 구하고 나오라”고 하는, 어쩌면 ‘빈말’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의 비극은 없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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