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과 자기 부정
프란치스코 교황과 자기 부정
  • 승인 2014.08.14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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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민
철학본색 대표
1. 하시즈메 다이사부로는 이렇게 말한다. “나나 당신이 쇼와 10년대(1935~1945년)의 일본에 살게 되어 어느 날 징병 소집되었다고 하자. 징병은 국민의 합법적인 절차에 따른 것으로 대일본제국헌법이 정한 국민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소집에 응해 전쟁터로 향하는 것은 정당하다”. 하시즈메의 사고실험을 함께 해보자. 확실히 그 시대라면 양심적 병역거부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내가 이 의무를 저버리면 나 자신은 물론 가족도 무사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 전쟁은 필요악이지만 이 전쟁의 본질이 침략전쟁이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도리어 서양 세력들로부터 조선 반도를 지켜내는 아시아 해방전쟁이라 믿고 있다. 나는 단지 ‘국민으로서’ 의무를 했고, 책임을 다한 것이다. 과연 어느 누가 소집에 응한 자들을 비난할 수 있다는 말인가?

2. 친구 A는 이렇게 말한다. “나와 네가 모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고 해보자. 그리고 우리 모두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중에 결혼을 했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내가 유학을 가서 학위를 하는 꿈을 접어두고, 그토록 증오했던 사교육 업계로 가게 된 것은 내 욕심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으로서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 선택은 정당하다”. 이번에는 A의 사고실험을 따라 가보자. 확실히 우리 현실에서 대학원생이 되어 경제 생활을 영위할 길은 학원 강사가 되는 것 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사교육의 문제점 때문에 학원 강사의 길을 가지 않는다면 나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나는 사교육은 필요악이지만 학원 강사가 도덕적으로 나쁜 직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도리어 공교육의 도움을 제때 받지 못하는 학생들에게는 꼭 필요하다. 나는 단지 ‘가장으로서’ 의무를 했고, 책임을 다한 것이다. 과연 어느 누가 나의 선택을 비난할 수 있다는 말인가?

3. 예수가 자신을 따르라고 어떤 제자에게 권하자 그는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 해 달라”고 청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일은 인륜이 요구하는 아들의 의무이자 인간으로서의 책임이다. 제자가 ‘아들로서’ 의무를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누가 과연 비난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예수는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하며 제자의 부탁을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가 제자의 말에 숨어 있는 교묘한 ‘자기 정당화의 논리’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제자는 인륜을 핑계 삼아, 현실과 타협하여 ‘예수’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예수의 대답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다.

4. 아들로서, 국민으로서, 가장으로서, 인간으로서 나는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었다’,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자기 정당화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가 만약 빛, 진리, 구원이라면 어찌 할 수 없을 것 같은 현실도 그 앞에서는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마찬가지로 일제의 식민지배로 고통 받는 사람의 눈물이 있다면,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한 것으로 타자에 대한 나의 의무가 끝나지 않는다. 사교육의 테두리 안으로는 결코 들어올 수 없는 이들의 아픔이 있는 한, 가장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한 것으로 정의에 대한 나의 의무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관행상 전관예우를 받는 법조인, 관례상 세금을 포탈하는 기업인, 권력을 이용해 온갖 부정을 저지른 정치인들에 대해까지도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이구나’하고 그들의 현실과 특권에 대한 상상력을 작동시키는 사이, 정작 불의로 인해 고통 받는 타자에 대한 상상력은 발휘되지 않는다. 나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했다고 하는 사이 ‘타자’에 대한 책임은 유기되고 말았다. 누구도 이런 나를 비난할 수 없다는 말은 사실상 한 인간으로서의 자유의지를 포기하는 말에 다름 아니다.

5.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했다. 그가 여느 교황보다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 어떤 자기 정당화의 논리도 그에게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교황이라면 세계 11억 카톨릭 신도의 수장으로 건강을 관리해야 하며 업무도 상당하기에 어느 정도의 특권은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은 방탄차 대신 지하철을 이용하며, 벤츠 대신 포드를 타고, 전용기 대신 국적기의 이코노미석을 이용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와 같은 철저한 ‘자기 부정’은 옳음, 일치, 사랑을 따르기 위해서다. 그는 미사를 집전하는 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사목의 의무란 마피아의 본거지 칼라브리아에서 마피아를 악의 숭배자로 파문하고, 규제 없는 자본주의를 새로운 독재라 비판하는 것을 포함한다. 또한 정치적 오해를 무릅쓰고 일억만리의 타자인 세월호 유족, 위안부 할머니, 강정마을 주민들, 쌍용차 해고 노동자를 만나는 것 역시 교황의 의무로 인수한다. 그런 의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의 의무는 ‘나’를 부정하는 것이요, 우리는 ‘타자’를 향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번 방문으로 자기를 부정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이 인간으로서 우리의 존엄을 지키는 것이라는 성서의 진리가 나와 우리 모두의 마음에 새겨지게 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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