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살았네, 이 집
오래 살았네, 이 집
  • 승인 2014.08.14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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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 시인

김천유기(鍮器)를 만들던 옛 주인이 떠나고 몇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던가 젊은 이웃들은 아파트로 다들 떠나고 나이 많은 노인들만 사는 낡은 달동네 백년 전통의 황금동 성당 위, 신라 때 고운(孤雲) 선생이 잠시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았다는 학사대(學士臺) 언저리, 개운사와 노실고개와 남산공원을 이웃한 이곳에서 참 오래 살았네.

봄이면 학사대 위에서 벚꽃잎이 휘날려 마당을 덮고 새벽 마당에는 아까시 꽃향기가 이슬로 내리지 송홧가루 노랗게 기와지붕에 내리는 밤, 고성산 뻐꾸기 우는 소리, 소쩍새 우는 소리 들으며 우르르 달려드는 적요(寂寥)한 달빛 아래 오래된 풍경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언덕배기에서 참 오래 살았네

겨울이면 시래기 흔들리는 뒤안이 있고 먼지 소복이 덮어쓴 다 낡은 지붕,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노인들 집 앞에 평상 놓고 부채질하며 한여름 밤이 저 혼자 달려가도 시간을 애써 붙잡지 않는다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이름 대신 누구네, 어르신, 선생, 형씨, 주사(主事)들이 모여서 참 오래 살았네

이제는 남아돌아 아무나 갈 수 있는, 그 편하다는 아파트 저 아래 멀리 내려다보며 빈집 같은 달동네에서 참 오래 버텼네 버리지 못하는 것들 붙들고 잠시 흘러가는 세월 놓아버렸네 한밤에 문득 개 짓는 소리에 깨어 일어나면 마당을 휘돌아 부는 바람만 서성이고 산다는 것 참 아득하네 세월이며 나이 같은 소소한 것들 어느새 한 줄기 담배 연기처럼 흩어져버리고 모두가 소외(疏外)된 도시 변두리 달동네에서 참 오래 살았네

이제 고성산 아래 무덤까지도 익숙한 사람들 세상 참 아무것도 아니라네 파란만장(波瀾萬丈), 저마다 소설같이 살아온 지난 세월, 고난의 가시밭길 같은 인생, 또한 아무것도 아니라네. 인생은 그저 부질없이 흘러가는 것, 오래 살았네 무덤 같이 익숙한 이집.

▷▶김종인. 1954년 경북 김천 출생. 1983년 세계의문학 등단. 시집 : 흉어기의 꿈, 내 마음의 수평선 등 다수

<해설>상당히 긴 산문시다. 자칫 읽어내기 곤란할 법도 한데, 끝까지 읽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만약 이 詩가 미로 같은 어긋맞은 모순 언어들이었다면 말장난이 됐거나 설령 읽더라도 한 줄 넘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詩가 지루하지 않고 잘 발효된 막걸리처럼 술술 넘어가는 것은 이 詩에서 강조하는 ‘무덤 같이 익숙한 집’ 같은 정갈한 언어들로 구성됐기에 그러하다. 제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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