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사다마 <好事多魔>
호사다마 <好事多魔>
  • 승인 2014.08.3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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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종 시인
1967년 2월16일 안동교육대학 제1회 졸업식 날. 첫 졸업생들은 장래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만 3년 뒤 모교에 일급 정교사자격강습을 꼭 받으러 온다고 기염들이 대단하다.

필자는 3년 뒤에 단연코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 호언장담했다. 학우들은 필자의 속마음도 모르고 엉뚱한 작자라고 마음으로 못마땅해 했으리라.

이 날 다짐한 다른 학우들의 꿈은 산산이 깨어졌다. 그때까지 상급자격강습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아, 1급 정교사자격강습은 7∼8년이 되어야 겨우 차례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절대로 안동교육대학에 돌아오지 않겠다던 필자의 장담만이 적중했다. 필자는 1969에 문교부가 실시한 중등교사자격 고시검정에 응시해서 곧바로 합격했다.

중등학교 역사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임용고시(순위고사)에 3등으로 합격하여 1970년 3월1일자로 문경시(당시 문경군) 가은중학교사로 발령이 났다.

당시 교육대학 수업연한은 2년으로, 국가로부터 수업료 면제를 받고 그 대신 초등교사로 2년간 의무복무를 해야만 했다.

그 2년 세월이 필자에겐 무한히 길어 좋이 10년은 되는 것 같았다. 의무기간이 끝날 무렵인 1969년 4월, 당시 유일한 경제신문인 현대경제일보(한국경제신문) 수습기자모집에 응시원서를 냈다.

84명이 응시하여 7명이 최종 합격을 했는데, 필자는 2등으로 합격하여 남들이 선망하는 중앙일간신문기자로 초등교사와는 비교도 안 되는 혁혁한 사회적 신분을 누리게 됐다.

호사다마라더니 수습기자로 며칠이 안 되어, 서울시내에서 참혹한 교통사고를 목격하고 충격을 받아 수습기자직을 내버리고 낙향했다.

지긋지긋하던 초등교사자리에 눌러 앉게 되었는데, 그 전에 근무하던 금동국교를 떠나 김용사 밑의 김용국교 교사가 되었다. 그 날이 1969년 6월1일이었다.

번잡한 서울거리를 떠나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김용국교 교정에 서게 되니, 절로 가슴이 답답했다.

서울에도 적응 못하고 산골에도 적응이 안 되니, 필자는 어쩔 수 없는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다.

며칠 뒤 당시 유일한 교육신문인 ‘새한신문’에 중대한 광고가 실려, 필자의 눈이 등잔같이 커졌다. 1969년 6월3일자로 중등준교사자격시험공고가 났다. 총 29과목이었다.

필자는 역사과에 응시하기로 마음에 점을 찍었다. 4년대 사범대학 수준의 시험문제가 출제된다고 교시했다.

문교부가 시험을 주관하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전공교수가 출제와 채점을 하는데, 시험문제는 100% 주관식이며 과락이 40점 이하고 평균 60점이 넘으면 합격이 되었다.

경쟁률이 문제가 아니고, 절대평가니 만큼 평균 60점을 넘는 것이 합격의 기준이 되었다. 자격시험이지만 합격자수는 응시자의 5%정도였다.

역사의 경우, 1교시에 국사(오전), 2교시에는 세계사(서양사/동양사)로 나눠 실시했고, 3교시엔 정교사자격증이 없는 응시자에게만 교육학시험이 실시되었다.

중등준교사자격시험에 합격하면, 실제 학력이 고졸이라도 4년제 대학졸업에 준하는 자격을 주어, 독학자들에겐 중등준교사 시험이 인기 만점이었다.

중등준교사응시공고를 보니, 수험일이 1969년 9월12일로 신문공고된 날로부터 3개월9일 밖에 남지 않았다.

3개월 공부하여 대한민국 최고 교원자격고시를 합격할 수 있을까? 너무 시일이 촉박했지만 험난한 초등교사를 면하기 위하여 급락을 생각할 여지없이 응시원서를 즉각 제출했다.

국교5년 담임교사로 학교에선 수험서적을 볼 시간도 없을 뿐 더러, 양심상 볼 수도 없었다. 퇴근 뒤 전기불도 없는 하숙집에서 저녁에 2시간, 아침에 2시간 하루 4시간 정도 시험공부를 했다.

응시날이 90일도 안 남았는데, 필자에겐 뜻밖의 날벼락이 떨어졌다. 제1회 제물조사가 실시되는데 필자를 담당자로 지명한 것이다.

재물조사는 업무상 서무담당이나 회계담당자, 과학자료담당자가 맡아야 하는데, 엉뚱하게 교무실 주전자담당인 필자를 꼴아 박았다.

사리에도 안 맞은 업무배정이었지만 힘없는 필자로서는 빼도 박도 못할 곤경이었다. 정신을 집중해도 너무 단시일 수험준비라서 합격이 전혀 불가능한데, 엉뚱한 잡무까지 떠맡게 되었으니 시험실패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현실적으로 힘들고 절망적인 상황의 연속이었지만, 시험을 결코 포기할 수는 없었다. 1969년 9월11일 오후2시 필자는 서울 종로구에 있는 풍문여고 교정에서 수험표 교부를 받았고, 다음날 아침부터 중등준교사역사교사 고시검정에 응시하여 차분히 답안을 작성하고 최선을 다해 치루었다.

시험준비 기간이 석달도 채 못 되었고, 태산 같은 잡무보따리가 응시를 방해했지만, 처절하게 대결하여 그 해 바로 소망하던 꿈을 단발에 명중시켰다.

당시 김용국교 김문규 선배교사는, 김시종은 천재라고 환호해준 것도 고맙지만, 김문규 선생님은 필자의 재물조사 잡무를 자진하여 도와준 쾌남아 중 쾌남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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