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그늘이 앉아있는 논귀 너머 나무들이 부리는
바람이 있다
언젠가 벼가 아우성처럼 일어서던 들판은 노을을 입고
저물어 갔다
어느 가을 빈 들판을 걷다가
나는 그들이 신음처럼 뱉어내는 참새떼를 봤다
먼 허공에는 북데기 구름 한 점 박혀있고
꾸부정한 몸에 걸친 누추를 벗어던지고
모의를 꿈꾸는 한 잎 노을빛처럼
구름 지층에 수북하게 쌓여가고
바람도 층계 이루며 깊어갈 뿐이었으니
나는 각오를 세월의 추에 매달고 흔들리지 않았다.
조각달이 낮달처럼 겨우는 낯, 흉터로 남아있는 가슴속
구름의 목울대로 울다 꺾인 내 의지가 뼛속까지 녹아든
꿈을 거두고 있었다.
▷▶제왕국 시인은 1957년 경남 통영시에서 출생했으며, 2001년 수필 추천과 2006년 시, 시조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한국시민문학협회, 경남문협, 통영문협, 수향수필 등 다수의 문학단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한편 미술 단체전 전시회 2회와 시집으로 ‘나의 빛깔’, ‘가진 것 없어도.’가 있다.
<해설> 오스트리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에 따르면 꿈은 현실과 가상의 충돌일까? 이 詩에서 ‘꿈을 거둔다,’는 것은 정성들여 가꾼 나락을 정갈한 손으로 거둔다는 것이다. 벼가 익을 무렵이면 참새 떼가 날아왔다 날아가는 정경이 아름답다. 이때도 흔들리는 벼가 있고 나무들이 부리는 바람이 있을 것이다. 이 詩 4행의 은유가 정말 감동적이다. 어느 것 하나 단어적 비유는 없다. 게다가 서로의 내면에 얼기설기 다듬어져 있는 시어들의 의미망이 확장되면서 정갈한 언어들로 곰삭아 얼큰한 농주 향이 숨 쉰다.
- 안종준 (시인·좋은시를 찾아서 해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