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서 빛난 열정…전통 입혀 세계시장 노린다
위기서 빛난 열정…전통 입혀 세계시장 노린다
  • 승인 2014.11.12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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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 크리스탈 수공예 공장 ‘우성크리스탈’ 조달곤 회장

천직으로 여기니 일이 즐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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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달곤 우성크리스탈 회장은 “수공예 크리스탈의 명맥을 잇게 하는 것이 자신의 몫이”라며 “해외에서 우수한 품질을 인정받고 수출되는 것에 긍지와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40여년 긴 세월. 한 우물을 판다는 것은 쉽지 않다. 3D업종에서 몸으로 떼워야 하는 일을 마다않고 긴 세월을 묵묵히 걸어간다는 것. 청년시절 첫 유리공장에 들어가 줄곧 외길만을 걸으며 한국 크리스털(Crystal·유리)의 세계화에 혼(魂)을 불어 넣겠다는 장인이 있다. 자랑스런 국내 유일의 ‘수공예(핸드메이드) 크리스탈 제조’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조달곤(65) 우성크리스탈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지난달 말 대구시 달성산업단지 내 우성크리스탈 공장에서 만난 조 회장은 예순이 훌쩍 넘었지만 쩌렁쩌렁한 목소리의 수더분한 경상도 사나이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첫 마디가 “아이고~ 내가 인터뷰 인물이나 됩니까. 훌륭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라며 겸손해 했다.


◇뭘 하던 고생, 천직으로 여겼다 = 부산이 고향인 조 회장은 27세 젊은 나이에 인척이 하는 부산 수정동의 유리공장에 급사로 취직해 유리와 인연을 맺었다. 그의 눈썰미와 손재주, 적응력은 놀랄 정도로 크리스탈 제조 전문가로 진입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조 회장은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내는 유리잔이 너무 좋았어요. 유리잔 속의 물맛은 이루 말할 수 없죠. 과거 수요가 많아 어떻게 하면 많이 찍어내느냐가 주요 관심사였어요. 고생은 하겠지만 이 분야를 천직으로 삼자 다짐하니 일이 즐거웠지요. 진급도 빨랐죠. 1976년에 생산부장이 되고 30대에 이사가 됐으니 회사에서 알아준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라며 웃었다.

그가 다니던 회사는 80년대 중반 달성공단으로 회사를 확장, 이전, 수동공장에서 자동화 공장으로 전환하게 된다. 자동화 공장(프레스 틀에 놓고 찍어내는)으로 확장을 했지만 3개월 동안 공장을 가동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다른 회사에서 기술자를 데려와 공장을 가동한다는 계획에 일본에서 선진기술을 배우려던 그의 꿈은 꺾인다.

조 회장은 “당시 다른 유리공장에서 기술자를 데려왔다는 거예요. 그런데 프레스 기술자가 필요한데 병(甁)을 만드는 기술자를 데려와 공장 가동도 못하는 상황이 됐죠. 어려워지자 회사가 저에게 공장을 가동해 보라는 거예요. 밤을 지새우며 공장을 가동시키자 당시 회사 회장은 기뻐하며 저에게 모든 공을 돌렸어요”라고 자부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점령군이 오고갔다. 그러나 열정을 모두 알아줬다 = 하지만 공장 재가동도 잠시 조 회장이 다니던 회사는 무리한 투자와 경영진의 오판으로 어려움이 닥쳐온다. 그렇지만 위기 속에서 그의 열정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긴다.

“회사는 3개월간 생산을 못했죠. 로스(Loss)는 늘었고 재고는 쌓여 부도위기로 몰렸어요. 당시 30억원에 이르는 차입금 부담이 만만찮았죠. 500여명의 종업원들이 거리로 쫓겨날 상황이 됐죠. 직원들은 당시 담보권을 가진 은행 앞에서 시위를 했어요. 이사를 맡았던 저도 비난의 대상이 됐죠. 하지만 당시 상업은행 지점장이 저에게 중재를 요청했어요. 시위를 해산시키고 회사 회생을 위한 사업계획서를 만들라는 거예요. 당시 유리원료를 용해시켜 두었던 용해로의 불을 지펴달라고 했죠. 불을 끄지 않고 두었던 유리 탱크로가 공장을 재가동할 수 있도록 했던 겁니다.”

그가 직원과 함께 밤을 새우며 만든 사업계획서의 핵심은 ‘유리 용해로’였다. 조 회장은 무엇보다 진정성을 믿어줬던 당시 상업은행 지점장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엎친데 덮친격’인가 당시 장마 등으로 제품이 나가지 않자 자금난이 이어진다. 다시 위기가 닥친 것이다. 그때 당시 성업공사(현 한국자산관리공사) 부장이 도움의 손길을 준다.

조 회장은 그 때의 고마움은 늘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성업공사 부장이 ‘당신이 회사 회생에 매진한다는 이야기 들었다’며 ‘지급보증’을 서주겠다고 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직원들을 모아 놓고 월급을 못 가져가도 성업공사 부장의 은혜를 갚자고 했어요.”

이런 노력에도 조 회장이 다니던 회사는 당시 국내 최대 슈퍼체인망을 갖춘 한남체인에 인수된다. 대주주인 모 상호신용금고 경영진은 다시 회사를 위기로 몰아넣는다. 그런 가운데도 희망의 불씨를 지피고 간 경영자도 있었다. 두산(斗山)과 기술계약을 맺은 것이다. 조 회장은 이것이 자신이 직접 크리스탈 제조공장을 운영하게 되는 계기가 될 줄이야 당시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고 한다. 점령군이 오고갔지만 기술력을 가진 그는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를 알아본 사람들은 그를 도왔다.

◇맨 몸으로 우성크리스탈을 세우다 = 당시 유리공장의 상무까지 오른 조 회장은 책임감으로 똘똘 뭉쳐져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두산과의 약속를 지키고 새로운 활로를 만들어야겠다는 각오였다. 하지만 대주주의 의지부족, 경영능력의 부재는 화를 키웠다.

“80년대 중·후반 회사 경영진은 권력과 관련된 사람들이 왔어요. 장단점이 있었지만 경영에는 한계가 따랐죠. 그 중에서도 가장 잘 한 것은 두산과의 기술계약을 맺은 거죠. 그 전에는 일반유리만 생산하다 크리스탈(Crystal)로 바꾼 거니까요. 막상 시작하니 1년 후 적자가 발생하자 대주주는 문을 닫아라 하더군요. 직원들과 매달렸으나 소용이 없었어요. 결국은 두산과의 거래가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됐죠.”

이 같은 상황이 덮쳐오자 조 회장은 직원들과 함께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조 회장이 떠난 유리공장은 회사의 이름을 바꾸고 업종을 전환했으나 회생이 불가능해 졌다.

조 회장은 “핵심 멤버가 없는 상황에서 제조를 포기하게 됐던 거죠. 결국은 대주주의 신용금고와 유통법인까지 연쇄 부도로 이어졌죠. 문제는 금융·유통업을 하는 사람들이 생산을 모르고 제조업에 뛰어들어 모든 것을 파국으로 몰고 간 겁니다”라고 꼬집었다.

이렇게 되자 두산크리스탈 공급망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 계약 당사자인 회사가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자 두산측은 조 회장에게 대책을 요청한다.

“두산측이 사업자가 아닌 저에게 대책을 요청하더군요. 저의 기술만 믿고 ‘한번 도전해 보겠나’라고 제안을 했어요. 제가 해보겠다고 했지요. 동구 반야월에서 세 들어 시작하게 됐어요. 1991년 우성크리스탈 창업부터 두산 ‘PARKA CRYSTAL’(파카크리스탈) OEM을 진행하게 됐죠.”

◇신뢰, 품질이 최고의 자랑…두산·일본 노리다케도 품질 인정 = 대기업인 두산은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될 뻔한 그에게 창업을 제안했던 것. 조 회장에 대한 두산의 신뢰는 ‘파카크리스탈’ 브랜드 사용계약을 통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의 두산그룹에 대한 사랑도 각별했다.

“두산그룹이 적극 밀어주었기에 가능했죠. 당시 본부장이 ‘당신 품질관리 정말 잘하더라. 남의 돈을 탐내는 사람도 아니더라. 애로사항은 뭐든 말하라. 적극 지원하겠다’라고 했던 말이 기억이 납니다. 기반을 다질 때까지 밀어줬죠. 이게 대중소기업간 상생협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두산그룹은 우리나라 크리스탈 산업의 효시다. 두산이 1974년 수출 전략사업의 하나로 크리스탈 사업을 착수함으로써 시작된다. 국내 ‘파카 크리스탈’ 브랜드가 대표적이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다’는 말처럼 그의 사업도 창업 6년만에 최대 위기를 맞는다. IMF(국제통화기금)가 터진 것.

“창업 후 두산과 OEM을 진행하며 미국, 일본으로 수출을 개시하고 아시아나항공 국제선 기내 유리잔을 공급하는 등 상당히 좋았어요. 그런데 IMF가 불어 닥친 거죠. 이런 상황에 98년 일본 대표 도자기 브랜드인 노리다케와 수출계약이 성사됐어요. IMF가 기회가 된 거죠. 노리다케는 이후 5년간 우리 공장에서 품질 테스트를 해줬어요. 두산에 이어 노리다케까지 기술력과 품질을 인정해줬으니 더 우리제품은 설명이 필요 없다고 할 수 있지요.”

◇크리스탈에 전통을 입혀 세계시장 도전 = 기원전 3천500년경 이집트 유물에서 최초로 발견된 유리가 메소포타니아, 로마제국, 유럽으로 전파돼 영국에서 수정에 비견되는 아름다운 크리스탈로 탄생해 소수만 누리는 전유물이 된다. 과거 혼수품으로 명절 선물로 귀한 대접을 받았으나 외식문화, 선물문화 등의 변화로 집안 찬장(饌欌)에서 귀한 장식품이 됐다. 하지만 빛과 감촉, 맛 등을 아는 애호가들은 여전히 크리스탈 제품을 선호한다. 조 회장은 크리스탈 제품의 업그레이드로 세계시장에 맞서겠다는 각오다.

“일본의 노리다케가 우리 제품을 가져가 금장해 미국 백화점에 입점시켜 큰 호응을 얻었어요. 제품 품질이 일본과 미국에서 통했다는 거죠. 세계 추세에 맞춰 크리스탈 컬러(Color) 제품 개발에 나서고 있어요. 일본이 금가루를 우리 제품에 입힌 것처럼 전통 나전칠기를 크리스탈에 접목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죠. 세계 크리스탈 애호가와 상류층을 겨냥한 마케팅이라 보면 됩니다.”

우성크리스탈의 우수성은 국내 대형유통업체도 이미 인정하고 있다. 현재 이마트 전국 매장과 롯데백화점, 신세계백화점, 현대백화점 등에 입점해 이탈리아, 독일 등의 해외 유명 크리스탈 제품과 당당히 경쟁하고 있다. 대구시 우수브랜드 ‘쉬메릭’에도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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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공예 크리스탈 제품은 배합-응융-성형-서냉-연마-조각 등의 공정을 거친다. 우성크리스탈 장인이 용해물을 쇠파이프로 말아 올리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
◇장인의 명맥 이어야…지역 관광산업에도 기여할 것 = 국내 유일의 수공예 크리스탈 최대 공장인 우성크리스탈은 지역의 자산이다. 조 회장은 ‘수공예 크리스탈 장인’ 육성과 ‘크리스탈 전시관’ 건립을 자신의 마지막 꿈이라고 한다.

“인공 크리스탈 제조 명맥이 끊어질까 두렵죠. 유럽은 100년의 전통을 이어가는데. 일본과 우리는 명맥이 끊어질 상황이죠. 젊은이들이 이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안타깝죠. 기술자에 대한 대우가 가장 큰 문제죠. 우리 회사엔 현재 10여명의 고수(장인급)가 있어요. 이들이 마지막 세대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게 제 몫인 것 같아요. 국가도 수공예 크리스탈 맥(脈)이 이어지도록 지원책을 내줬으면 해요.”

그는 ‘크리스탈 전시관’ 건립을 위해 동분서주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구지역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제주도에는 유리의성이, 경기도 안산 대부도에는 유리 테마파크인 유리섬박물관이 관광명소가 됐죠. 국내 유일 크리스탈 최대공장을 가진 대구지역에서 유리공예 작품을 체험하는 공간이 없으니 아쉽죠. 현재 관광명소로 뜨고 있는 사문진나루터를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는 대구 상징새인 ‘독수리’, 대구하면 떠오르는 ‘사과’ 등 지역의 상징물들이 빛나는 크리스탈로 탄생돼 지역을 찾는 귀빈들에게 전달되면 좋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두산그룹 회장이 20년전 우리 공장에 부탁해 삼성 이건희 회장에게 선물한 것처럼….”

조달곤 회장은 마지막으로 “우리의 우수한 제품이 일본, 미국 등지로 수출되는 것에 긍지와 보람을 느낍니다. 수공예 크리스탈을 배우려는 젊은 사람이 없으니 답답하죠. 대학만이 아닌 기술자가 우대되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어요”라고 했다.

김종렬기자 daemun@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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