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벌이도 괜찮았다
오늘 벌이도 괜찮았다
  • 승인 2014.11.24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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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락 수필가
여행은 시간낭비가 아니라 버는 거라고 했다.

움직이고 보는 만큼 좋은 결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뜻일 게다. 막연히 먹고 쓰고만 다니면 낭비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만 요즘 여행은 노역에 가깝다. 기실 그것도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니 이래저래 힘 든다.

어쨌든 이 만추에 나는 좀이 쑤셔 집에 가만있지를 못한다. 큰 아이의 직장이 타지에 있어 휴일에서야 같이 모일 수 있는데 집에 있어봐야 각기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소통 부재는 벗어나지 못한다. 하여 어제저녁에 미리 약수로 만든 한방백숙이 유명하고 단풍이 좋은 데가 있으니 가자며 운을 떼 놓았다.

휴일 아침, 깨워도 좀체 일어나지를 않는다. 밤엔 활기가 넘치다가도 아침만 되면 맥을 못 추는 게 요즘 아이들의 습성이란다. 겨우 열두 시가 되어서 집을 나섰다. 화가 치밀어 올라도 내가 좋아서 펼쳐놓은 일, 야단이라도 치면 괜히 종일 분위기를 망칠 게 뻔하다. 무언가 얻으려고 시작한 마당에 잃어서야 하겠는가. 크면 당연히 그늘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억지로라도 머리를 맞대 묵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건 부모마음이리라. 간간이 느껴보는 그 단란함으로 인해 우린 살아가는 힘을 얻는지도 모른다.

‘청량대운도’를 보여주고 싶었다. 얼마 전 문학단체에서 다녀왔는데 단순히 단풍구경과 식도락에 치우칠 게 아니라 첩첩산중 운무에 쌓인 산수화가 가슴에 오래 남을 것 같아서이다. 그리 멀지도 않는 청송의 ‘청량대운도 전시관’을 택한 것이다. 폐교를 사서 단장해 놓았는데 우람한 화폭 앞에 절로 머리가 숙어진다. 전지 사백 매 분량에 길이가 사십육 미터, 꼬박 육 개월을 산기슭 한 창고에서 자연과 건강에 맞서가며 대작을 남겼다. 그뿐만 아니라 숱한 기록과 화제 속에서 선생의 값진 영혼을 배우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무엇보다 속이 후련한 것도 있지만, 그것을 완성하기까지 각고의 노력과 불타는 집념에 경외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점차 나약해져만 가는 시점에 그분의 의지와 신념이 필요해짐을 절감한다. 뭣 때문에 돈도 안 되는 것에 매달려 저 고생을 할까, 더러 안타까이 여기는 사람도 있을지언정 저런 분으로 인해 우린 정신이 깨어있고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삶을 살찌우고 인간을 인간이게 해주는 헌신, 뼈저린 노력이 새삼 분발을 일으킨다.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정신을 이어갈 수 있으면, 단 한 사람이라도 깨우쳐 힘을 낸다면 큰 보람일 것이다.

묵향에 취해있는 동안 벌써 산그늘이 진다. 직원이 문을 닫는다고 전열기를 끄기 시작하자 전시관도 급자기 쌍그렇다. 단풍도 지고 추수도 어지간히 끝나간다. 그 빛 좋던 감이며 사과도 다 떨구고 마른 잎만 휑하다. 따갑던 햇볕도 찬 기운에 수그러져 금새 옷깃을 여민다. 예부터 소나무가 많다고 청송이라 이름 지어진 고장, 산수경관이 뛰어나서 예술인이 많은가 보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교통이 불편한 오지였지만, 지금은 곳곳에 관광지를 개발하여 사통팔달 찾은 이가 끊이지 않는다.

밖은 어둡고 차가워도 차 안은 따뜻하다. 간혹 외딴집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면 유심히 살피는 습성이 있다. 저 집엔 이 시간에 누구와 뭘 할까 궁금해진다. 옛날 같으면 호롱불에 옷을 깁거나 책을 읽을 텐데…. 언젠가부터 그런 실루엣의 정경을 무척 그리워하고 있다. 아무런 걱정이 없을 듯 포근한 정이 온방에 가득한 곳, 문풍지에 바람이 세고 조금은 추워도 따뜻한 아랫목에 온 가족이 모여 단꿈을 꾸는 그런 순박함이 좋았다.

상념에 젖는 동안 큰 아이는 운전을 하느라 여념 없다. 뒤쪽을 돌아보니 아내와 작은 아이는 곤히 잠에 빠졌다. 모든 걸 맡긴 채 포근히 잠든 모습,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게 ‘참 행복이다 싶다’ 어둠 속 전조등 사이로 목표거리를 알리는 하얀 숫자는 점점 줄고 있다. 시골 길을 벗어나 촘촘히 들어선 도시 불빛에서는 그만 압도당한다. 슬며시 한쪽에서 현실의 장벽이 밀려오고 없던 일들이 슬금슬금 눈덩이처럼 늘어 들이민다. 이걸 치우면 저것이 달려들고 다 끝냈던 일들이 또 옆길로 삐져나와 앞길을 막으려 든다.

그렇지만 비록 짧은 여행이었어도 ‘야송’선생의 청솔 운무 기개는 살아 가슴에 살아나고, 맑은 정기는 얼추 십 년 전으로 되돌려준 것 같다. 개운하다. 더불어 화목한 가족애를 얻었으니 이래저래 오늘 벌이도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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