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리를 만나는 또 다른 방법
우리가 우리를 만나는 또 다른 방법
  • 승인 2014.11.30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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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태주 미술평론·미학
배태주 미술평론·미학
현대인들은 바쁘다.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는 모두 스쳐 지나가는 타인이다. 하이데거는 일상성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를 ‘그들’이라 부른다. 그들은 잡담과 애매성, 호기심을 그들의 특성으로 삼는다. 잡담은 일상성의 주체인 ‘그들’이 쏟아내는 말이다. 잡담은 따라 말하고 퍼뜨림으로써 함께 나누는 기분을 강화한다. 사태자체는 사라진 채 해석하면서 또 해석되면서, 말이 말을 만들며 떠돈다. 그것은 많이 퍼뜨려짐으로써 진리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터넷은 이런 의미에서 잡담을 공유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잡담을 삶의 공간으로 실어 나르느라 더욱 바빠지고 장치들은 우리를 피상적인 존재로 만든다. 잡담은 자기 존재를 표명하기 위해 자신을 개방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에게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개방시키지 않는 이런 삶은 비본래적인 것이다.

우리는 잡담을 통해서 본래적인 자기 존재를 만나지 못할 뿐 아니라 타인의 삶에도 접근하지 못한다. 한 인간이 스스로의 고유성을 지킨다는 것은 일상성에 사로잡힌 ‘그들’로 매몰되지도 않고 추상적인 익명성으로 전락하지도 않음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에게 세계-내-존재로서 본래적인 인간의 모습은 세계 없는 순전한 주체로 존재하거나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타자 없는 고립된 자아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때 타인은 나를 제외한 사람들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존재로서 나와 함께 더불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일상성 속의 ‘그들’인 우리는 자신과 다름에서 오는 차이를 내세워 타인을 분리하고 배제함으로써 안주하고자 한다.

프랑스 예술가 그룹 ‘도시의 야영지Campement Urbain’의 <나와 우리>는 관계의 새로운 형식을 만들며 일상생활 공간 안에서 변경을 실현하려 한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이민자로 구성된 파리 외곽의 공동체의 거주자라면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는 열린 과정으로 마련되었다. 이민자들은 자신들을 분리하고 배제하는 논리 속에서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말하거나 향유할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공동체를 기반으로 진행되는 예술 프로젝트가 사업으로 불리듯 지역 공동체가 참여자로 자리할 때 현실적 요구를 우선시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지역 공동체가 이끌어 낸 결론은 달랐다. 그들이 논의를 거쳐 그려낸 것은 열악한 그들의 환경과 무관한 것이었다. 예술은 자본의 논리와 전혀 다른 방향에서 자본주의 경쟁구조 속에 내몰린 삶의 문제에 접근한다. 예술프로젝트에 동참한 지역 주민들은 한 사람에 의해서만 점유될 수 있는 사색 또는 명상을 위한 장소를 설립하기를 원했다. 그것은 고독에 전념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홀로 있는 존재의 가능성을 위한 것이었다. 자기 자신과 대면할 시간과 공간을 갖는 것이 불가능한 이민자들이 그들 자신을 위해 고독을 위한 장소, 미학적인 장소를 건설하려 한 것은 예술을 위한 과업이 된다. 이렇게 유용성에서 벗어난 것으로부터 예술은 작동한다. 그 무익함으로 예술은 변화를 만들어 낸다. 그들의 논의는 예술가 집단에 의해 조율되거나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에 합치되도록 유도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현실적 이해와 무관한 미학적 활동을 통해서, 대화를 통해서 보이지 않던 자신들을 드러내 보이도록 한다. 루시 리파드는 공동체가 모든 사람들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차이를 해소 할 수 있게 하지는 않지만 차이들 안에서 그것들이 변화하고 전개되는 데에 따라 작업하는 방법을 알게 한다고 말한다. 대도시의 외곽에 자리하고 있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누구도 보려하지 않는 ‘그들’로, 대도시와 대도시를 잇는 교통수단마저도 지나쳐버림으로써 세계-내-존재로 있는 자신의 본래성을 망각하고 일상의 ‘그들’로 있게 한 구조도 따라 드러난다. 예술 프로젝트 과정에서 지역공동체의 말은 잡담으로 흩어져 나가지 않고 목소리를 갖게 된다. 수단으로서의 언어는 이성적 주체가 자신의 의지를 전달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논리적 필연성에 종속되고 주체적인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에 반해 하이데거는 근원적인 의미에서 언어가 자신과 다른 것을 모아들이고, 모아들임으로써 함께 놓여있게 함을 의미하는 것에 주목한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일은 불편한 일이다. 그리고 그 자신 속에 배제하려고 한 타인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더 힘든 일이다. 우리는 그 불편함을 회피하기 위해 잡담 속으로 빠져든다. 하지만 타자와 더불어 있는 공통세계를 외면할 수는 없다. 보이지 않는 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배려는 보이지 않는 이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것과 닿아 있다. 자기를 열어 놓은 말하기를 통해 공통세계에 있는 타인도 자신의 말을 찾아간다. 우리는 타자를 통해, 주위세계를 통해 자신을 이해한다. 예술은 일상 속에 묻힌 말들이 놓여나는 자리, 또 다른 내가 놓여나는 자리이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 자신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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