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시론> 이태백, 그는 포도주를 즐겨 마셨다
<팔공시론> 이태백, 그는 포도주를 즐겨 마셨다
  • 승인 2009.07.28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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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근 (대구동촌초등학교 교장· 문학박사)

우리 고전 문학 작품에는 술이 많이 등장한다. 1103년 고려의 계림유사(鷄林類事)에는 술이 2음절 고유어인 수?로 나타난다. 이 어휘는 수?>수울>수을>술의 과정을 거쳐 지금의 술로 사용되고 있다. 고유어 막걸리는 1728년(영조 4년) 김천택의 시조집 청구영언(靑丘永言)에 나온다.

막걸리의 형태 구조는 막(부사) + 거르다(서술어)에서 명사화한 것으로 `방금 거른 술’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한자어 주(酒)는 과일, 꽃 등의 명사와 합성어를 이루면서 다양한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에 나오는 이태백은 포도주를 즐겨 마셨다. 중국 당나라 시인 이태백(李太白 701~762)의 이름은 이백(李白)이고,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며, 태백은 그의 어머니의 꿈에 태백성(太白星)을 본 후 출산하여 붙여진 자(字)이다.

또한, 이태백을 적선(謫仙)이라고 한다. 적선은 천상에 옥황상제가 계신 백옥루(白玉樓) 앞에는 황정이라는 뜰이 있고 거기서 신선들이 황정경(黃庭經)이라는 도교의 경전을 읽는데, 글자 한 자를 잘못 읽어 인간세계로 귀양 온 仙人이란 뜻이다. 하지장(賀知章)은 이태백의 시를 읽고, 감탄한 나머지 적선(귀양온 신선)이라 부르고, 허리에 차고 있던 금구(金龜)를 풀어 술을 한턱냈다고 한다.

이태백은 말년에 포도주를 취하게 먹고 낚싯배에 앉아 채석강 속에 비친 휘영청 밝은 달을 건지려다 익사하였으며, 산중대작(山中對酌) 등 1049여 수의 시를 남겼다. 이태백은 포도주와 상관관계가 있다.

이태백이 살았다는 마을이 중앙아시아 쇄엽(지금의 키르기스스탄)에서 태어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지방의 특산인 포도와 연관이 있다. 포도는 본디 아시아 서부 이란 고원의 특산으로서 이태백의 고향과 가까운 지역이 포도의 원산지이다. 서양의 포도는 여기서 이식한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의 와인(wine)은 중앙아시아, 이집트를 거쳐 페니키아 인들에 의해 그리스, 로마, 프랑스로 전파되었다. 프랑스는 현재 성인 한 명이 1년에 235병의 와인을 먹는다고 한다.

중국어 학습서인 박통사언해 초간본(1517)에는 포도가 평음인 보도(葡萄)로 나타나 있고, 이 어휘는 격음화 과정을 거쳐 보도>포도로 어형이 굳어지는데, 조선 숙종 때 홍순명(洪舜明)이 펴낸 일본어 학습서인 왜어유해(倭語類解)에는 지금의 어형과 같이 포도로 표기되어 있다.

고려 충렬왕 11년(1285)에는 원제(元帝)가 고려의 왕에게 포도주를 보내왔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말기 문인 안축(安軸 1282~1384)의 시문집 근재집(謹齋集)에는 포도주의 어휘가 나온다. 이백과 함께 중국 5천 년의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시성(詩聖) 두보(杜甫 712~770)의 자는 자미(子美)이고, 호는 소릉(少陵), 공부(工部), 노두(老杜))이다.

두보의 고향은 하남의 공현(鞏縣)이지만 755년 안록산(安祿山)의 난으로 봉상, 동곡 등을 거처 성도(成都)에서 절도사 엄무(嚴武)의 도움으로 교외에 초당(草堂)을 짓고 평온한 생활을 하다가 악주(岳州)와 담주(潭州) 사이 호남 상강(湘江)의 배 안에서 59세에 세상을 떠났다. 두보는 15년간 대나무가 많은 사천(四川) 지역에서 불우, 고난의 피난 생활을 하며 죽엽주를 즐겨 마셨고, 북정(北征) 등 1450여 수의 시를 남겼다.

중국 동진의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 ~ 427)의 연명은 자(字)이고, 이름은 잠(潛)이며,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이다. 그는 41세 때에는 아예 관리 생활에서 물러나면서 유명한 `귀거래사’를 남기고, 고향에 돌아가 스스로 괭이를 들고 고된 농사일을 하면서도 국화를 벗 삼아 여생을 보냈으며, 국화주를 즐겨 마셨다.

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은 변 사또 생일날 먹은 술은 ??쥬이다. 그리고 이 주기로 “금준미주천인혈(金樽美酒千人血) 옥반가효만성고(玉盤佳肴 萬姓膏) 촉루락시민루락(燭淚落時民淚落) 가성고처원성고(歌聲高處怨聲高)”라는 시를 지었다. 이 어휘는 쥬 >빡빡쥬>빡빡주와 같이 시옷계 합용병서에서 경음화, 단모음화 과정을 거쳐 `빡빡주’가 되었다.

지금은 이 어휘가 사어가 되고 막걸리 어형으로 교체되었다. 이들은 지역의 특산에 맞는 차별화된 술을 마시며 영감과 창작 의욕을 높였다. 그리고 이름 있는 술을 벗 삼아 많은 걸작을 남겼다. 우리의 술 문화도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세계 속의 일류 국가로 나아가는 전략과 아이디어를 생성하는 신선한 음료의 하나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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