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의 선물
산타의 선물
  • 승인 2014.12.04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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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민 철학본색 대표
아이는 여름부터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을 하자고 졸라대고 있다.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은 겨울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해봤자 소용 없다. 왜 여름에 하면 안되냐는 물음에 크리스마스가 겨울에 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도 겨울에 하는 것이라는 동어 반복에 가까운 답만 해주었다.

한 겨울, 크리스마스 트리만이 만들어내는 온기와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아이는 그리워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일년 내내 눈이 아닌 먼지가 내려 앉은 창고 안의 크리스마스 트리를 꺼내어 함께 이런 저런 물건들로 장식을 하며 한 해동안의 여러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분위기를 아이는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아이는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툭하면 차 한잔 하러 가자고 하는 ‘커피한잔의 여유를 아는 품격있는 남자’이기도 하니까.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이 왜 하고 싶냐고 아이에게 물었더니 대답은 아빠의 예상에서 한참 동떨어진 ‘형이하학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크리스마스가 되어야 선물을 받으니까!”.

종을 울리면서 먹을 것을 주면, 먹을 것을 주지 않은 채 종만 울려도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가 했던 실험의 개처럼 아이는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을 하면 선물이 온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트리를 만들면 ‘선물’이 내게 온다. 그래서 아이가 ‘트리 장식을 하자’고 하는 말은 ‘선물 주세요’라는 뜻을 내포한 하나의 시적 은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아이는 갖고 싶은 선물을 아빠에게 달라고 하지 않고 트리 장식을 하자고 한 것일까? 로봇 장난감이 갖고 싶었다면, 동화책을 사고 싶었다면 아빠에게 사달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아이는 어째서 ‘트리 장식을 하자’는 우회적인 표현을 했던 것일까? 선물을 사달라고 하기가 뭔가 부끄러워서였을까? 선물 받고 싶으면 아빠한테 이야기하면 될텐데 왜 트리 장식을 하자고 했는지 다시 아이에게 묻자 이번에는 아주 ‘형이상학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선물은 산타 할아버지가 주는 거잖아”. 산타 클로스, 맞다. 선물은 산타 할아버지가 주는 건데 아빠한테 이야기할 필요는 없는거다.

철학자 데리다(J. Derrida)에 따르면 ‘선물’은 불가능하다. 선물이 선물로 주어지려면 어떤 상호적 관계나 교환, 부채 의식 등이 존재하면 안되는데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내가 그에게 주었던 것을 나에게 다시 돌려주거나 내게 고마움을 느끼거나, 혹은 반드시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면 나와 그 사람 사이에는 선물이 아닌 선물로 포장된 ‘거래’나 ‘뇌물’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진정한 선물은 상호적이어서는 안되고 일방적이어야 한다. 진정한 선물이 되려면 선물을 받는 쪽에서 뿐만 아니라 선물을 주는 쪽에서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까지도 망각해야 한다.

선물은 산타 할아버지가 주는 것으로 믿고 있는 아이를 보니 안도가 되었다. 선물은 아빠가 아니라 ‘산타’로부터 주어진다고 믿는 이상 ‘크리스마스 선물’만큼은 결단코 실패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는 자신이 자는 사이에 다녀 가는 산타 클로스에게 아무리 부채를 갚고 싶어도 갚을 수 없고, 보답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산타가 선사한다고 믿는 크리스마스 선물은 그렇기에 일방적이다. 채무 상환의 의무가 없는 완전한 선물!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울면 안되고, 누가 착한 애인지, 나쁜 애인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산타 할아버지가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주신다’는 캐롤은 크리스마스 선물이 담고 있는 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 울어도 된다. 착하지 않아도 된다. 크리스마스 선물은 댓가 없이 주어지는 대문자 ‘선물’이기 때문이다. 아빠가 준 선물이 ‘산타가 준 선물’외 되어야 하는 것은 선물을 뇌물로 전락시키지 않겠다는 아빠의 알리바이다.

크리스마스 선물은 산타가 준다는 믿음을 아이가 오래동안 지키도록 해주고 싶다. 그래서 나는 겨울 밤에 아이와 함께 누워 산타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거다. “산타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아. TV나 어린이집에서 나타나는 산타는 산타를 흉내낸 것이지 진짜 산타는 아냐. 산타 할아버지는 전화가 없어서 목소리도 우리는 들을 수 없어. 그런데 산타 할아버지는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우리 집에 오셔서 선물을 주고 가실거야. 그 이유는 아빠도 몰라”.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공부를 잘해야 하고, 밥을 먹었으니 일을 해야 하고, 울지 않은 착한 아이이기 때문에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세계에는 행복이 없다. ‘대가 없는 선물’, 그러니까 선물을 뇌물이 아니라 ‘선물’로 주겠다는 의지는 거래의 의지가 아니라 사랑의 의지다. 그것이 신이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크리스마스가 담고 있는 정신인지도 모르겠다.

거저 받은 것이어야 거저 줄 수 있다. 나에게 선물을 주는 세계는 나에게 우호적인 공간이다. 그래서 아이가 산타를 믿고 있다는 것은 ‘선물’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 아직 남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산타가 되어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자. 아이에게, 그리고 주변의 이웃들과 소외된 이들에게 돌려받을 수 없는 선물을! 그리고 내가 준 모든 선물을 잊자. 이해타산적 관계를 우정과 연대의 관계로, 소비의 삶을 나눔의 삶으로, 경쟁적인 사회를 우호적인 사회로 변화시키는 일도 어쩌면 작은 선물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선물을 주는 세계, 그 세계는 우리 모두에게 우호적인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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