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 없던 날
재수 없던 날
  • 승인 2014.12.21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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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종 시인
부담감 없이 읽을 수 있는 게 ‘그 때 그 사람’이야기가 아닐까? 필자의 글도 ‘그 때 그 사람’이야기로 가볍게 읽어주시면 고맙겠다.

필자는 중학교 1학년 때인 1954년 4월호부터 학생잡지인 ‘학원(學園)’의 단골독자가 되었다. 6·25직후 읽을거리가 없던 시절에 창간(1952년)된 학원은 독자층이 중·고등학생뿐 아니라, 어른들도 즐겨 읽는 범국민 잡지로 대우를 받았다.

당시 우리나라 제일의 부수를 자랑하는 동아일보도 독자수가 5만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학원의 전성시절 판매부수가 8만부를 뛰어 넘었다. ‘학원’의 인기가 절정을 이룬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연재소설인 ‘홍길동전’(정비석), ‘얄개전’(조흔파), ‘날개 없는 천사(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박계주) 등과 학생만화 ‘코주부 삼국지’(김용환), ‘꺼꾸리군 장다리군’(김성환) 등의 연재물이 교과서보다 ‘학원’에 더 미치게 만들었다.

필자의 중학시절 3년도 학원을 애독하는 사이에 훌쩍 지났다. 월간 ‘학원’에는 학생들의 끼를 발산하는 장치가 있었는데, ‘웃음 천국(유머텔레비전)’과 ‘학원문단(學園文壇)’ 란이다. 필자의 소품(小品)이 처음 활자화된 것은, 중3때(1956년) 그 해 ‘학원’ 9월호 ‘웃음 천국’란에 필자가 지은 ‘O형’이 채택되어 발표됐다. 원안 그대로 옮기면,

‘O형’(김시종·문경중)//선생: 똘똘이 네 피가 무슨 형이냐?/ 똘똘이:....2πr 형입니다./선생: 어째서?/ 똘똘이: O형이니까요/ 선생:...???// 잇따라 필자가 지은 유머는 보내는 족족 발표가 되었다.

1957년 3월2일에 문경중학교를 졸업하고, 중순에 마을 이발관격인 ‘오케이 이발관’에서 중학생 시절에 기른 머리털을 깎고 중학생시절의 잔재를 청산하게 됐다.그때 필자와 같이 이발하던 초등학교동기생 친구 옆에는 구두닦이 도구통이 놓여 있었다. 그 때만 해도 중학생은 희소가치가 있어 대우를 받았으나, 구두닦이를 하는 초등학교 동기생은 필자가 보기에도 제대로 손님대접을 못 받는 것같이 보였다. 친구에 대한 애틋한 마음 덕분에 필자가 생전 처음으로 꽁트를 짓는 계기가 됐다. 친구의 이름은 ‘박용서’였고, 아버지가 병상을 지키셨다.

몇 푼 안 되는 구두닦이 벌이로 친구 용서는, 식구들의 밥과 아버지 약값을 마련하는 어려운 처지였다. 필자는 집에 돌아오기 바쁘게 백지에다 연필로 ‘구두닦이 소년 박용서’이야기를 적어 나갔다. 글을 이어가면서 크게 고통을 느낀 것은, 어휘능력이 많이 부족하여 적절한 말을 제 자리에 적을 수 없었다.

구두닦는 도구를 넣는 통(상자)을 무엇이라 표기해야 할 지 얼른 떠오르지 않아, ‘슈사인 박스’라고 적었지만 내심 시원하지 않고 찝찝하기만 했다. 지금 생각하니, ‘도구 통’이라고 하면 무난할 것 같다.

현진건의 뛰어난 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을 필자는 그때까지 접하질 못했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워즈워드 대시인이 읊었지만, 새삼 그 말이 명시(名詩)임을 절감한다.

비록 200자 원고지 10장의 꽁트지만, 폭력을 고발하고 약자를 옹호하는 필자의 마음(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중학생 마지막 시절에 지은 꽁트 ‘재수 없던 날’은 문경고등학교 1학년 시절인 1957년 학원 6월호에 학원문단 산문부 선외가작(選外佳作)이 되었다. 당시 심사위원은 소설가 최정희 선생님이었다.

학원문단은 중·고등학생뿐 아니라 문학청년·장년층도 노렸다. 달마다 600편 이상의 응모작품이 쇄도했다. 그 중에서 시부 10편, 산문 10편을 뽑는 게 고작이다. 부문별 입선 3편, 선외가작 7편으로, 10등 안에 들어야 작품명과 작자명이 발표 되었다. 필자가 선외가작이 되던 그 달에 ‘장마’로 입선한 이기태(동래중 3)는 나중 경찰청장이 되었고, 나와 같이 선외가작을 한 조해일(보성중), 이성훈(서울사범)은 중견 소설가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학원문단은 맹물이 아니라 펄펄 끓는 뜨거운 물인 것이다. 극작가 오혜령도 학원문단 산문부의 단골손님이었다.

당시 이화여중에 다닌 오혜령의 이름은 학원문단 산문부 선외가작을 놓치지 않았다. 오혜령은 연세대 입학성적이 전체 2등이었고, 졸업성적은 수석인 재원이었다.

그는 1960년대 중반 조선일보·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희곡 가작으로 찬란하게 문단 데뷔를 했다. 지금 생각하니 필자의 꽁트 제목은 ‘재수 없던 날’이지만 재수가 무지하게 좋았다. 문인 숫자가 1천명 안팎이던 1980년 초에 학원문단에 이름을 보였던 출신들이 200명이나 한국 문단에 진출하여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여, 지금은 사라진 ‘학원’의 위력이 옹골차게 느껴진다.

필자는 단 한번의 투고, 단 한번의 선외가작으로 찬란한 학원출신 문인의 빼지를 달게 되었다. 순간이 일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새삼 실감난다. 점촌 중신기 말랑에 있던 ‘오케이 이발관’에서 머리감던 쾌감이, 문학인생으로 이어질 줄은 ‘진정 난 몰랐네’를 복창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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