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우는 옷
태우는 옷
  • 승인 2015.03.04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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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리 시인

서문시장 1 지구 태우는 옷, 가게를 지나친다

한 번도 사람을 입어 보지 못한 옷이,

한 번도 사람을 입지 못할 옷이

망자를 따라간 어느 언덕에서

불 태워지면 그뿐일 옷이

태우는 옷, 이름을 달고

매대에 차곡차곡 개켜져 있다

생애 사람 한 번 입지 못했는데 옷이라면

생애 행복 한 벌 입지 못한 몸도 삶일까

생애 불행 한 번 벗지 못한 영혼도 삶일까

옳은 시 한 편 못 쓴 시인도 시인일까

옳은 직업 한 번 못 가진 사람도 사회인일까

출생과 동시에 죽은 동생도

병상만 전전하다 처녀귀신 된 고모도

저 옷과 함께 불태워졌다

어떤 옷은 고관대작을 입다가 벗기도 하지만

어떤 옷은 평범한 삶 한 벌 꿰입지 못하고 일생이 저문다

저무는 지도 모르는 시렁 위에 가만 얹혔다가 어느날 팔려나간다

아무런 구김살도 없고 한 점 얼룩도 없어

깨끗함이 공포로 다가오는 태우는 옷 가게를 지나치면

내 심장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바람 불어와

때 묻은 내 옷자락을 휘날리고 간다

▷▶이해리 대구 출생. 2003 평사리문학대상. 시집 ‘철새는 그리움의 힘으로 날아간다’ ‘감잎에 쓰다’

<해설> 삶과 사랑도 늘 함께 할 때는 소중함을 모르고 잃어버린 후에야 비로소 알게된다. 삶이 빈약하지도 않고 황폐하지도 않다. 이 세상에 어느 물건 하나라도 버릴 것이 없다. 언젠가 필요에 의해서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안종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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