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오신 교장선생님
가을에 오신 교장선생님
  • 승인 2015.09.06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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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종 시인
필자의 인생도 가을이 되어, 지난날 중·고교 교사시절 가을(2학기)에 부임하신 교장선생님이 생각나고 그리워진다.

중·고등학교 교장은 교육계의 꽃일뿐더러 소신을 가지고 교육계획을 실천할 수 있는 요직이다. 그럼에도 보통 사람들은 돈 잘 벌고 권력이 있는 기관장을 제일로 치고, 중·고등학교 교장은 뒷전으로 밀어 두는 게 보통이다.

필자가 교사, 교감 재직 29년6월 동안에 모신 교장선생님이 무려 스물 한분이 된다. 그 중 필자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준 교장선생님은 강석균(가은중) 김석정(산북중) 김철희(문경고) 박택상(문경고) 서보상(문경공고) 백승익(문경고) 김병조(산양중) 선생님이다.

위 일곱 분의 교장선생님은 지금도 필자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존경하는 일곱 분의 교장선생님 중 ‘가을에 오신 교장선생님’에 걸 맞는 강석균 가은중 교장선생님에 대한 지난 시절을 조명하고자 한다.

1970년 3월1일 부임한 가은중학교는 필자의 초임 학교로, 젊은이에게 첫사랑과 같은 정서적으로 잊지 못할 곳이다.

가은중학교는 문경시 가은읍 소재지에 있는 이수명 교장이 사립 가은중학교를 처음 세웠고, 뒤에 공립으로 승격되었다.

초임지가 되어 학생지도와 학교업무에 젊음을 기꺼이 전력투구했다. 당시 경제사정이 어려워 서민들은 돼지고기를 추석이나 설이 아니면 맛볼 수 없었지만 가은중학교 교직원들은 한 달에 두 번씩 가은장터에 있는 김천호씨 식당에서 숯불 돼지고기 파티를 어김없이 치렀다.

가은은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희양산 정상 큰 봉우리엔 늘 서기가 서렸으며, 양산천 맑은 물이 마음까지도 씻어주는 참 멋스럽고 정겨운 지역사회였다. 국영 광업소 은성탄광도 당시 전성기를 구가했다. 부임한 지 반년 만에 교장이 셋이나 바뀌는, 좀 어리둥절한 일도 있었다.

부임할 때는 정용화 교장이었는데, 두 주일 만에 문경서중으로 영전하시고 후임으로 노쇠하신 심기철 교장이 오셨는데 건강이 악화되어 반년도 못 돼 사직하시고 말았다. 그 후임으로 오신 교장이 강석균 교장선생님이었다. 강 교장선생님은 의성군 춘산중학교 교장으로 계시다가 가은중 교장으로 영전하신 것이다.

강 교장선생님으로 봐도 더 큰 학교로 오셔서 좋으셨겠지만, 우리 가은중 교사로서는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강 교장선생님은 전형적인 교육자의 꼬리타분(?)함이 없었다.

강 교장은 교사·교감을 거치지 않고 사립학교(선산고등학교)를 세워 바로 교장이 되셨다. 사재(私財)를 아낌없이 털어 학교를 세우고 지역 영재들의 요람을 만드신 것이다.

강 교장은 스케일이 크고 성격이 소탈하며, 물욕이 전혀 없었다. 태평양전쟁 때 학병 장교출신이며, 해방 후 선산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두 번 출마하시기도 했다.

정치가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참신한 교장으로 후진양성에 크게 이바지하게 된 것이다. 교사들은 교장이 새로 부임하게 되면 신경을 바짝 쓰게 마련이다.

폭군이 아닌, 인자한 윗전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 교무실에 나타난 강석균 교장선생님은 교사들에게 ‘내 취임사를 교무수첩에 적으라’가 엄포를 놓았다.

교장선생님치고 취임사를 교무수첩에 적으라는 분이 없었는데, 이 어른은 보통 별종이 아니겠구나 하고 처음부터 기가 죽었다.

그런데 강 교장은 필자가 겪은 교장 중 가장 부드러운 호감이 가는 좋은 교장선생님이셨다. 교직원 사기앙양을 위해서는 스케일이 큰 어른이지만 세심함을 보이셨다. 교사 사기를 높여 줘야 학생 학력 향상이 따른다는 것을 간파하신 것이다. 당시 젊은 교사들은 하숙이나 자취를 하는 경우가 많아 영양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했다.

강 교장은 한 달에 한 번씩 교장 사택으로 전 직원을 초청하여 진수성찬이 무엇인가 푸짐한 식사를 마련하여 시범을 보여주었다.

일부러 음식을 만든 게 아니라 제사음식을 낫게 차렸다고 하셨지만, 달마다 제사가 있을 리 없고, 부하(교사)를 아끼는 마음으로 특별히 마음먹고 마련하신 것일 게다.

많은 음식을 마련하는 수고를 하신 사모님도 일제 때 경북여고를 나온 드문 지성인으로 동갑인 강 교장과 농담을 자주하셨는데 유머지수가 수준급이었다.

필자가 정년퇴임할 때까지 부하(교직원)를 유쾌하게 해주시던 강 교장 같은 어른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강 교장은 1970년에 자체 재원을 마련하여 추석 보너스를 처음 지급했는데, 당시 한국 교육계 최초의 쾌거라고 확신한다.

직급에 관계없이 1인당 2천200원을 봉투에 넣어 주셨다. 당시 물가를 보면 돼지고기 한근 값이 150원이었다.

필자가 책임 편집한 가은중학교 교우지 ‘가중나무’ 창간호엔 강석균 교장선생님의 발간사가 적혀 있어, 지금도 가끔 읽어보며 행복한 시절을 떠올린다.

강 교장 재임당시 졸업한 제자들이 문경시청 간부(국·과장)를 문경중 다음으로 많이 포진하여, 강 교장의 감화가 크셨음이 입증된다.

어디에 가든지 진퇴(進退)를 분명히 하라는 강석균 교장선생님의 생전의 말씀이 필자 인생행로의 좌우명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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