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의 방
독백의 방
  • 승인 2016.02.16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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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민 철학본색 대표
한 주에 한 번 라디오 방송에 나가 책을 소개하고 있다. 책 한 권을 정해 진행자와 15분 정도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다.

이제 라디오는 거의 자동차용 매체가 되었기 때문에 운전자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책 소개에 집중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나가는 프로그램의 작가는 항상 내게 ‘좀 더 쉬운 책’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한다. 책 소개도 쉬워야 하고, 소개하는 책도 쉬워야 한다. 물론 나 역시 쉽게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처음 방송에 나가 소개했던 책은 서경식 선생의 <내 서재 속 고전>이라는 책이었다. 작가와 PD는 책이 어려운 편이기는 했지만 소개는 쉽게 해서 다행이라고 피드백을 해줬지만, 다음 방송부터 소개해 줬으면 하고 예로 든 책은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 고가 후미타케의 <미움 받을 용기>와 같은 책이었다. 청취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베스트셀러나 상대적으로 가벼운 에세이를 소개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라디오의 청취자들이 쉬운 책에 더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누군가 소개까지 하며 알려주지 않더라도 이미 다 아는 유명한 책이나 예비적인 준비가 없어도 읽을 수 있는 쉬운 책들은 아무리 좋은 책이라고 해도 방송에서 소개하고 싶지가 않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청취자들이 항상 쉬운 것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믿는 쪽이다.

조심성이 없는 비교일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기 있는 최신가요보다 바흐의 음악을 어렵게 느낀다. 하지만 바흐의 음악을 듣는 것을 특별한 ‘경험’으로 여기지 않는가. 쉬운 책도 당연히 좋은 책일 수 있지만, 쉬운 만큼 사실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신문에 쓰는 글도 마찬가지다. 칼럼이 신문에 실리고 나면 ‘지나치게 철학적이다’라는 평을 한번은 듣게 된다. 여기서 ‘철학적’이라는 것은 칭찬이 아니다. 담당 기자가 ‘어렵다’는 말을 돌려 말한 것일 뿐이다.

얼마 전, 한 신문사에 원고를 보내자 이번에도 기자는 ‘너무 철학적’이라고 했다. 사실 내가 보낸 원고의 글감이었던 황현산 선생의 <우물에서 하늘보기>는 내가 쓴 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책이다. 이 책에 실린, 결코 쉽게 읽히지만은 않는 시화(詩話)들은 일간지에 선생이 4천자 분량으로 두 주에 한 번씩 1년여간 연재했던 글이다.

그러니까 소위 ‘쉽지 않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떤 ‘자격’이 필요하다. 이미 탄탄한 독자층이 확보되어 있는 논객이나 작가, 직업적으로 어려운 말을 해도 좋다고 암묵적인 허락을 받은 경우라 할 수 있는 교수나 변호사, 평론가들이라면 굳이 글을 쉽게 쓰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이 쓰는 글에 앞서 있는 그들 존재가 이미 독자들을 설득하는 힘이 있다. 내가 글을 쉽게 써야 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말해, 나는 그런 자격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일부러 어렵게, 현학적으로 쓰지 않는다. 단지 30대 남성, 지방 거주자이자, 독립연구자라는 내 위치에서 보이는 세계를 드러내고, 이 세계에서 살아가며 겪게 되는 어려움을 글로 드러내기 위해 노력해 왔을 뿐이다.

나는 가능한 한 쉽게 쓰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런 노력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문장을 쉽게 풀어내는 재주의 부족 탓이 크겠지만, 어렵다는 반응을 만날 때마다 나는 내 글의 주제가 독자들에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 변명해왔다.

왜냐하면 읽는 사람이 가진 생각이나 관점과 일치하는 글이라면 복잡하고 어려운 문장으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쉽게 읽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김훈처럼 쉬운 표현으로 빼어난 문장을 직조해 사람들의 통념을 깨트리는 글쓰기는 나 같은 범부가 닿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그동안 나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말할 수 있는 공적 발언권을 얻지 못하고 나만의 좁은 공간에서 독백에 가까운 글을 쓰며 살았다.

책을 내고 신문에 글을 쓰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게 허락된 ‘최소한의 발언권’을 지키고자 신문사의 요구에 맞춰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쉽게 써달라’는 요구는 내 목소리를 내기 위해 얻고자 했던 발언권의 의미를 훼손시킨다. 신문에 글을 쓰기 위해 담당 기자의 요구에 따라가다 보면 정작 내가 쓰고 싶은 글은 쓰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재주는 빈약한데 글도 쉬워야 하고, 주제도 쉬워야 한다. 만약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읽고 싶은 책을 소개하면 결국 다시 독백의 방에 갇히게 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청취자와 독자에게 나는 소통불가능한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 사실상 독백에 불과한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금 나는 독백의 방에 있는 것일까? 나 역시도 어려운 글을 쓸 ‘자격’이 없다고 여겼던 사람의 글은 읽으려 하지 않았고, 길고 어려운 글을 마음과 시간을 내어 읽으려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쉽게 쓰고 싶다. 하지만 어떤 인간의 삶도 단순하지 않고, 폭력적인 단순화를 하지 않는 한 진실한 책이 쉬운 글로 쓰이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글이 어렵고 복잡하게 된 것은 글재주의 부족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깊이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세계는 단언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글쓰기의 윤리는 쉬운 주제를 쉬운 글로 쓰는 것에 있지 않다. 어렵고 복잡한 글을 견뎌줄 수 있는 독자의 존재가 글쓰기를 윤리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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