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똑순이 “남한서 배운 공부, 지역민과 나누고 싶다”
탈북 똑순이 “남한서 배운 공부, 지역민과 나누고 싶다”
  • 황인옥
  • 승인 2016.05.04 18: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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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강연 맡은 최금희씨

나흘 꼬박 굶고 두만강 넘어

7년간 중국 떠돌다 남한 정착

배움 갈증에 오롯이 공부 전념

전재산 들고 러시아 유학도

‘박물관이야기’서 인문학 강의

경험담 섞인 색다른 강연 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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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희씨는 “한국, 중국, 러시아, 북한을 체험하고 중국과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경험을 살려 ‘최금희’만의 콘텐츠를 만들어 가고 싶다”고 했다.


부드러운 외모와 달리 말투가 똑 부러졌다. 언뜻언뜻 도전적인 모습도 비쳤다. 남한 사회의 부정적인 현상을 지적하는 대목에서는 날카로운 논리도 폈다. 우연히 만난 탈북자 최금희(42) 씨의 첫인상은 ‘강렬함’이었다.

한 달 후인 지난 3일, 강연장에서 다시 만난 강사 최금희는 ‘한 달 전에 만난 그 사람이 맞나?’, 잠시 의구심이 들 정도로 달달했다. 말투에는 부드러움이 넘쳤고,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순했다. 특히 강연 중에는 고전에 대한 전문 지식과 북한과 남한, 중국 생활, 러시아 유학 등에서 체험한 풍부한 사연들을 넘나들며 열정을 뿜어냈다.

이날 최 씨가 진행한 강의는 대구 중구 북성로의 복합문화공간인 박물관 이야기가 주최한 ‘행복한 인문학으로의 기행’ 이었다. 이 인문학 강의는 지난 4월부터 시작해 7월까지 매주 화요일에 진행되고 있으며, 최 씨가 강사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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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야기에서 진행되는 인문학 강의 모습.
◇ 탈북자 출신으로 인문학 강의를 시작하다.

- 강의 소개부터 해 달라.

“러시아의 톨스토이나 푸시킨과 중국의 고전을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우는 인문학 강의다.”

- 탈북자 출신 인문학 강사는 처음 들어봤다.

“인문학 강의는 나로서도 처음이다. 탈북자가 꼭 북한실상이나 인권에 대한 강의만 하라는 법은 없지 않나.(웃음) 대한민국에 와서 7년 동안 인문학을 공부했으니 전공을 살려 지역 주민들의 정서발전에 기여하고 싶어서 하게 됐다.”

- 계기가 궁금하다.

“남한에 오자마자 대학 입학을 준비하고, 이듬해 대학에 들어갔다. 지난해 8월에 대학원까지 마쳤다. 7년 동안의 긴 공부를 마치고 지인에게 내가 공부한 것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마침 ‘박물관 이야기’의 고금화 대표님께서 흔쾌히 허락해 주셔서 성사됐다.”

- 강의 내용이 중국과 러시아 문학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 독특하다.

“나는 중국이나 러시아문학을 대학과 대학원에서 전공했기 때문에 두 나라의 문학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두 나라의 철학과 문학과 문화를 아우러거나 비교하면 훨씬 풍부한 강의가 되지 않겠나.”

- 수강생은 몇 명이며, 반응은 어떤가?

“20여명이 강의를 수강하고 있다. 수강생 대부분 문학도가 아닌 일반인들이라 강의 내용을 쉽게 풀어서 하고 있다. 중간 중간 나의 드라마틱한 삶을 강의 내용과 연결 짓기도 해서 다른 곳에서 접할 수 없는 색다른 강의라는 평가를 해 주신다. 내 강의를 따뜻하게 받아들여 주셔서 고마울 따름이다.”

◇ 드라마틱한 남한 망명기

최금희. 그녀는 2001년 탈북해 중국에서 은둔하다, 2007년에 남한으로 왔다. 2007년 한국 정착 후, 중국에서 만났던 남자와 결혼식을 올리고 대구에서 함께 살고 있다.

- 탈북 당시 북한 상황은 어땠나?

“내가 탈북하기 전인 90년대 중후반은 북한 경제와 식량 사정이 최악이었다. 내 20대는 ‘고난의 행군’ 시기였다. 어머니가 의사셨는데도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다.”

- 탈북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북한 주민 모두가 기아에 허덕일 때 간간히 잘 먹고 잘사는 부류가 있었는데, 알고 봤더니 중국에서 돈을 벌어오는 케이스였다. 내 주위 언니가 그런 경우였는데 하루는 나한테 중국에서 일하면 한 달 월급이 북한 10년 치 월급과 맞먹는다며 함께 중국으로 가자는 제안을 했다.”

-무조건 갔을 것 같다.

“며칠 고민을 했다. 하지만 배고픔은 견디기 힘들었다. 앉아서 굶어 죽거나 두만강을 넘다가 총에 맞아 죽거나 이판사판이었다. 강을 넘기 전에 나는 꼬박 12끼를 굶은 상태였다.”

- 가족과 함께였나?

“단순하게 중국에 돈 벌러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족에게는 식량 구하러 간다고 하고 혼자 갔다”

- 탈북과정은 순조로웠나.

“경험이 있는 언니와 함께 해서 탈북과정은 힘들지 않았다. 운도 따랐다. 현지에서 마음착한 시골주민의 집에서 은둔생활을 잠시 하다가 대도시로 나가 무작정 일을 했다. 처음에 중국어를 모르기에 조선족이나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이나 회사에서 일을 하기도 하면서 돈을 모았다. 많은 고생 끝에 돈을 좀 모았고 나중에는 자그마한 개인사업도 하게 되었다.”

- 지금의 남편도 그때 만났다고 들었다.

“처음 두만강을 넘고 숨어 지내던 시골농부의 친척이 지금의 내 남편이 되었다. 남편은 중국인이기에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한국에 먼저 왔고 5년 뒤 나도 한국에 들어왔다.”

- 중국으로 탈북하고 7년 만에 남한으로 망명해 왔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나?

“남편은 한국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나는 중국의 도시를 떠돌며 사업을 했다. 남한 기업을 상대로 하는 악세사리 만드는 사업도 하고, 한정식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아르바이트도 했다.”

- 경제적으로 힘들지는 않았나?

“내가 사업 기질이 있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악세사리 사업을 할 때는 직원을 18명을 데리고 있을 정도였다. 식당도 잘됐다. 불법체류자니 큰돈을 벌기보다는 그냥 직원들 월급 주고, 임대료 내고 좀 여유 있는 정도의 수입이었다.”

- 결국 남한으로 오게 됐다.

“중국 생활은 늘 불안했다. 언제 중국 공안에 잡힐지 몰라 스트레스가 극심했다. 마침 한국에 갈 수 있는 루트를 알게 됐고, 자금도 있고 해서 한국행을 결심했다.”

◇ 남한에서 못다 한 학업을 잇다.

최금희는 2008년 3월에 남한으로 망명해 대구에 정착했다. 인터넷을 통해 대구가 따뜻하고 교육도시이고, 자연재해가 잘 일어나지 않는 지역이라는 것을 접하고 대구에 정착했다. 대구에 터전을 잡자마자 그녀는 대학 진학을 꿈꾸고, 입시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경북대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하고, 내친 김에 경북대학교 일반대학원 러시아문학을 전공해 석사를 졸업했다. 남한 망명 후 장장 7년을 공부만 팠다.

- 왜 공부였나?

“북한에서 잠깐이었지만 평양의 한 명문대학을 다니기도 했었다. 고난의 행군시기 중퇴를 해서 늘 공부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중국에서도 공부하려고 했지만 불법체류자라 불가능했다. 그래서 한국에 오자마자 주저 없이 공부부터 시작했다.”

- 의사를 한 어머니의 영향도 있었을 것 같다.

“어머니가 북한에서 의사를 하셨는데, 월급은 많지 않았지만 환자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농산물이나 생필품을 가져다주어서 고난의 행군 이전까지는 풍족하게 살았다. 북한은 대학진학율이 10%미만인데, 아버님이 학자셨고, 어머니는 의사, 언니 오빠들도 명문대를 졸업하고 자기 분야에서 인정을 받는 전문가들이었다. 공부에 대한 열망은 집안 환경이 많이 작용했다.”

- 남한에서의 대학생활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중어중문학은 한자에도 익숙하고 중국생활도 오래 해서 힘들지 않았는데, 러시아문학은 짧은 기간에 하려고 하니 힘이 많이 들었다.”

- 학비는 남편이 지원했나?

“전혀 아니다. 탈북대학생은 정부에서 등록금을 지원해줘서 어렵지 않았다. 대신 생활비가 문젠데 내가 통일관련 강의나 중국어, 러시아어나 한자 과외 등으로 조달 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충당했다.”

-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러시아에 교환학생으로도 갔다고 들었다. 그야말로 똑순이로 보인다.

“러시아에서 꼭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신청을 했는데 됐다. 내가 간 대학은 러시아모스크바국립인문대학인데 명문대학이다. 명문대를 선택한 댓가는 높은 비용이었다. 그 대학이 모스크바의 중심에 있다 보니 물가가 비싸서 어학당 비용이나 생활비가 많이 들었다.”

-어떻게 비용을 충당했나?

“한국에 와서 처음부터 유학준비를 했다. 남한에 정착해서 아르바이트를 계속했기 때문에 3년이 되니 정착금에 그동안 모은 돈이 2천만 정도 되었다. 남한 정착 3년 만에 전 재산을 들고 유학을 간 셈이다.”

◇ 건강한 남한의 일원이 되고 싶다.

- 남한에서 생활하며 느낀 남한의 강점은 무엇인가?

“편견이 없지 않지만, 탈북자인 내가 망명해서 여기까지 왔으니 충분히 살만한 사회라고 본다. 독일의 아도르노라는 학자가 ‘잘못된 사회가운데 올바를 삶이란 있을 수 없다’라고 했다. 북한에서는 우리 엄마가 의사였음에도 우리 모두 최소한의 생활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게 살았다. 잘못된 사회였기 때문에 그랬다. 거기에 비하면 남한은 살만한 사회다.”

- 힘든 점은 무엇인가?

“좀 부족하고 어려운 사람을 보듬어 주는 따뜻한 정서가 부족한 것 같아 힘들었다. 이는 탈북자들이라면 대개 느끼게 되는 감정일 것이다. 그런 정서가 탈북자들에게 방어막을 치게 하고, 마음을 닫게 하는 것 같다. 이 또한 탈북자들이 극복해야 하는 숙제로 본다. 나 역시 남한 사회에 넘어왔기 때문에 남한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더 노력할 것이다.”

- 앞으로의 바람은 무엇인가?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민주시민강사로서 지역주민들에게 대한민국의 소중함을 전하고 싶다. 9년 동안 살면서 남한의 빛과 그림자를 느끼지만 이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 없듯이 완벽한 사회는 없다고 생각하며,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내게 주어진 소명을 다하고 싶다. 앞으로 한국, 중국, 러시아, 북한을 체험하고 중국과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경험을 살려 최금희 만의 콘텐츠를 계속해서 만들어 가고 싶다.”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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