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근법으로 그려낼 수 없는 신비
원근법으로 그려낼 수 없는 신비
  • 승인 2016.05.31 21:3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news/photo/first/201605/img_198827_1.jpg"/news/photo/first/201605/img_198827_1.jpg"
권영민 철학본색 대표
원근법을 뜻하던 ‘코멘수라티오’ (commensuratio)라는 말은 ‘측정할 수 있는’, ‘같은 단위로 잴 수 있는’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회화에서 원근법이란 거리감을 바탕으로 대상을 조화로운 비례에 따라 표현하는 기법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런 기법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던 15세기에 왜 ‘코멘수라티오’라는 말이 원근법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는지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니까 원근법은 인간이 세계를 측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등장했다. 15세기, 유럽인들은 더 이상 세계를 측정불가능할 정도로 큰 무한한 것으로 바라보지 않고 ‘측정가능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도제작을 하면서 공간을 재고, 시계를 가지고 시간을 측정했다. 피렌체 대성당의 돔 설계자이자 원근법 발명자인 브루넬레스키가 뛰어난 시계공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브루넬레스키는 원근법과 시계로 공간과 시간을 측정하고자 한 것이다.

다니엘 아라스는 우리가 원근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15세기에 수태고지를 주제로 그려진 작품들을 살펴봐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 원근법을 사용했던 초기 작품들은 거의 다 수태고지, 즉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를 잉태할 것을 알려주는 성서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두스가 말한 것처럼 수태고지는 “무한(신)이 유한(인간)으로, 비척도가 척도로 나타나는 순간”이다. 남자를 알지 전혀 알지 못하는 동정녀가 신의 아들을 잉태하는 신비를 표현하는데는 원근법이 적합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근법은 세계를 ‘측정할 수 있는 유한한 것’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여러 점의 수태고지에서도 원근법이 사용되고 있다. 코르토나에 있는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는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을 준다. 1433년 경에 그려진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천사 뒷 편으로 보이는 방의 커튼과 침대의 위치가 지나치게 가깝게 그려졌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1450년 경에 그려진 산마르코 수도원에 있는 수태고지의 경우에도 천사보다 멀리 있는 마리아가 아주 크게 그려져 있는데다 마리아 뒷 편으로 보이는 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아주 작게 그려져 있어, 마리아가 이 문을 통과해 방으로 들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프라 안젤리코는 원근법을 사용하는데 기술적으로 미숙했던 것일까? 다니엘 아라스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원근법은 세계를 측정하는 것인데 동정녀의 몸의 신비는 이 모든 측정을 초월하는 것이기에 프라 안젤라코가 의도적으로 원근법의 규칙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성육신의 신비는 원근법으로도, 시계로 측정되지 않는다! 이것이 프라 안젤리코가 수태고지에서 원근법의 규칙을 따르는 동시에, 원근법의 규칙을 위반한 이유였다.

이제 원근법으로 측정불가능하고 표현불가능한 것은 ‘수태고지’의 신비만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신비 대신 또 다른 측정불가능한 것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인간의 삶이 80년 정도 지속된다 할 때,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한 방사능 피해는 측정가능한 것일까? 방사능으로 인한 피해는 수백년, 수만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의 척도를 완전히 넘어서 있다. 방사능의 영향은 후쿠시마라는 지역적 범위를 완전히 초과해 어디까지 피해를 주고 있는지 파악이 되지 않는다. 측정불가능하고 설명불가능한 것을 ‘신비’라고 한다면 우리는 ‘수태고지의 신비’를 ‘방사능의 신비’로 대체한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옆 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원근법으로 그려낼 수 없는 신비는 우리에게도 가득하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사망한 사람이 200명이 넘고 피해자도 1500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이것이 전부일리 없다. 자주가는 식당, 병원, 마트, 아이들이 매일 가는 어린이집에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다면 집계되지 않은 피해가 훨씬 더 클 것이다. 미세먼지가 불러오는 피해는 측정 가능한 것일까? 미세먼지가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보도가 매일 같이 나와도 학교에서는 체육대회를 열고, 아이들은 미세먼지를 힘껏 들이마시며 축구를 하고, 공사장 인부는 마스크도 없이 계단을 오르내린다. 미세먼지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까지 영향을 주는 것일까? 그 피해는 언제 나타나게 될까? 방사능도, 가습기 살균제도, 미세먼지도 원근법적 질서만으로는 표현되지 않는다.

원근법적 규칙을 따르는 것으로 표현불가능한 것은 이제 “구원의 신비”가 아니라 “파멸의 신비”다. 영혼의 구원 대신 안락만을 구원으로 믿었던 우리에게 방사능은 생명 대신 죽음을 고지하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을 수태할 것이라는 천사의 말에 마리아는 “당신의 말씀대로 제게 이뤄어지도록 하소서”라고 답했다. 방사능이 우리에게 ‘죽음’을 잉태할 것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원근법을 넘어서는 신비’, 즉 모든 척도를 넘어서는 위험 앞에서 이제 답해야 하는 질문이다.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