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 승인 2016.06.22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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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옥 대구미술비평연구회·미술학 박사
파꽃이 동그랗게 폈다 지더니 파꽃 지던 그 길로 5월이 따라갔다. 대신 흰 나비꽃 날개 위로 능소화 웃음소리 요란하고 촘촘한 등심붓꽃은 파꽃처럼 정답다. 존재를 한 무리에 묻은 불두화 덕분인지 천지사방이 둥근 기운으로 생동하는 6월. 유난히 꽃이 많은 오뉴월엔 꽃들과 이웃할 수 있어 행복했다.

산야의 꽃들은 피고 지며 모습도 바꾸는데 그림 속의 꽃들은 한결 같은 모습이다. 시들거나 지는 법 없이 늘 고정태다.

플랑드르의 화가 안 브레헬의 <나무통의 커다란 꽃다발>(1606~1607)만 봐도 알 수 있다. 공간감이 생략될 만큼 만개한 꽃들은 400년이 흐른 지금도 기세등등하다. 바로 그림의 환영이 주는 매력일 것이다.

서양미술사는 꽃그림에 환영을 추구한 시기를 17세기로 기록한다. 1660년 프랑스에서 정물화를 아카데미 공식 장르로 인정하면서 화가들은 꽃을 정확하게 묘사하기 시작했다.

특히 프로테스탄트가 우세했던 네덜란드에서는 교회나 궁정 귀족의 후원이 줄어 시민이 작품의 주된 구매자가 되었다. 당시 그림에서 일상적인 주제를 선호하게 된 계기였다.

네덜란드인들은 사실적인 정물화와 풍경화를 좋아했고 그 중 화려한 꽃그림은 인기가 높았다. 이유는 실제의 진귀한 꽃보다 가격이 저렴하고 필멸의 꽃을 활짝 핀 상태로 오래 두고 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더하여 장식적인 효과는 최대치다.

그러나 당시 안 브레헬이 그린 꽃다발과 같은 꽃묶음은 존재한 적이 없다. 시간차를 두고 몇 달에 걸쳐 피는 꽃들의 조합이었던 것이다. 주문자의 요구를 충족시킨 화가의 탁월한 묘사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엔 화려한 꽃 그림만 성행한 것은 아니다. 정물대 위엔 종종 해골도 함께 오르곤 하였는데 해골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암시하는 상징물이다.

고대로부터 서양에서 죽음은 작품의 주요 주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의 교훈이 그렇다.

옛날 로마의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돌아와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에게‘메멘토 모리’를 외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언젠가는 죽을 것이니 승리했다고 우쭐대지 말고 겸손할 것을 상기하려는 의도였다.

이 같은 태도는 인간의 오만함을 경계하며 허영과 무상함이라는 바니타스(Vanitas)정물화로 옮겨졌는데 해골을 그린 것은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 바니타스 양식이 21세기에 와서 다시 등장한다.

영국의 현대미술작가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1965~)의 <신의 사랑을 위하여>(2007년)가 대표적지 않을까.

두개골에 백금과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박은 <신의 사랑을 위하여>는 인간의 욕망과 죽음과의 상관관계를 조망한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결국 메멘토 모리나 바니타스, 화려한 꽃 그림과 보석을 박은 해골작품은 예술이 오랜 시간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놓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죽음에 대한 질문이 짙을수록 생동하는 삶의 현장이 그립다.

지난해 봄이다. 처음 간 모 학교가 낯설어 도움을 청하려고 조교실로 갔더니 마침 조교가 자리를 비우고 없다. 그 자리를 털털한 중년분이 지키며 친절하시다. 교직원이려니 하던 차에 조교가 왔고 친절하던 그 분을 학과장님이라고 소개한다.

더 놀란 것은 조교실 한쪽 벽면에 쌓인 컵라면 탑이었다. 배고픈 학생이라면 누구나 먹을 수 있도록 학과장님의 사비로 채워놓는 라면이라 하였다. 얼마 전 스크린도어 사고로 숨진 정비용역업체 직원이 남기고 간 컵라면과 오버랩 되어 코끝이 찡하다.

세월 가도 시들지 않는 꽃그림은 삶의 절정만을 탐닉하는 인간의 욕망을 견준다. 해골에 박힌 보석도 세속적 유희와 삶의 덧없음을 우회로 들춘다.

환영의 예술이 진실보다 더 진실 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순간이다. 일면 예술의 생명력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희망한다. 환한 모습 그대로 그저 예쁜 꽃들이 만발한 세상이기를. 예쁜 꽃과 빛나는 보석 위에 역설의 무채색을 덧입히지 않아도 되는 작가가 많아지는 세상이기를.

메멘토 모리를 외치는 씩씩하고 굳은 절개를 겸비한 리더가 차고 넘쳐 젊은 꿈이 스크린 도어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세상이면 더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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