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태양초
아버지와 태양초
  • 승인 2017.07.25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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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란 주부·자유기고가
무더위로 숨쉬는 것이 힘든 한여름이다. 에어컨이 없으면 뜨거움에 온 몸이 녹을 지경이다. 얼마전에는 시골에 있는 친정엄마에게도 에어컨을 설치해 주었다. 체력과 정신력이 약해진 엄마가 혹시 더위라도 먹을까 염려되어서이다.

엄마가 젊었을 때는 한여름, 빠알간 고추를 따느라 바빴다. 대낮의 펄펄 끓는 태양열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새벽부터 포대기를 경운기에 얹고 밭으로 향한다.

아버지는 바싹 마른 몸으로 탈탈탈 경운기 운전을 한다. 힘이 약한 아버지는 부지런히 손을 놀리면 되는 고추따기 선수다. 비틀비틀 오르막을 오르고 덜컹덜컹 내리막을 내려가 넓은 밭에 도착한다.

고르게 펼쳐진 밭이랑 위로 비치는 햇살에 이슬이 금광처럼 반짝거린다. 고랑이 넓게 펼쳐져 있어 언제 다 딸까 싶다. 초록 고춧잎 사이사이로 빠알간 고추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하니 손으로 아니딸 수가 없다. 한 고랑씩 맡아 물기 묻은 빨간 고추를 딴다. 키가 작은 홍희는 학처럼 서서 고추를 딴다.

한 손으로 탱글탱글한 고추의 꼬투리를 잡고 살짝 비틀면 힘들이지 않고 딸 수 있다. 톡하고 떨어질 때는 상쾌하기까지 하다. 가끔은 비틀고 비틀어도 떨어지지 않는 고추가 있다. 질기게 매달려 있어, 결국 두 손을 맞잡고 힘껏 따야한다. 포대기에 고추가 수북이 쌓인다.

손톱이 찌든 때마냥 새까매지고 벌건 고춧물에 손도 더러워진다. 그러나 탁탁 떨어지며 쌓이는 소리가 엽전 쌓이는 돈자루 소리 같다. 돈자루가 가득차면 무겁다. 혼자서 질질 끌며 경운기쪽으로 옮기고, 빈 포대기를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고랑을 온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고추따다 쓰러진 노인이 있다는 뉴스가 나올만큼 살인적인 더위다. 점심을 먹고 쉬고나면 어두워질 때까지 또 고추를 딴다.

아버지와 엄마는 농사이야기, 동네사람들 이야기, 친척들 이야기, 대구에 나가있는 언니오빠들 이야기를 한다. 긴긴 하루다. 해가 지고 경운기에 고추를 싣고 집으로 온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우르르 쏟는다. 멍석이 좁을 만큼 많이 땄다. 골고루 펼친다. 그래야 잘 마른다. 매캐한 냄새가 온 집을 휩싼다.

달빛을 받으며 고추도 자고 사람도 잔다. 물기를 뱉아내며 빳빳한 살갗으로 둔갑한 고추는 만지면 쩌그렁쩌그렁 소리를 낸다.

속에서는 딸랑딸랑 씨앗소리가 난다. 말랐다는 신호다.

아버지는 트럭 몰고 온 장사꾼과 흥정을 한다. 아버지보다 더 크고 뚱뚱한, 그러나 가벼운 마른 고추포대기를 저울에 매달고 근을 잰다. 한 근에 얼마, 값을 정하면 고추는 장사꾼에게 가고 아버지는 돈을 받는다. 두툼한 돈뭉치만큼 묵직한 기쁨이 밀려오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번진다. 온 몸이 시원해진다.

아버지는 돈을 쓰지 않는다. 돈은 금방 엄마에게 건네지고 다시 장롱속으로 사라지고 장판밑에 숨겨진다. 아버지는 그 돈을 대구에 나가 있는 자식들 멍석 깔아주는데 쓰는 것이다. 크고 넓은 멍석을 깔아준 자식도 있고, 그보다 작고 좁은 멍석을 깔아준 자식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로선 최선의 멍석을 깔아주기 위해 긴긴 여름해도 무서워하지 않은 것이다.

넓은 멍석 깔아준 자식에게는 떳떳하고, 좁은 멍석 깔아준 자식에게는 죄인마냥 미안해 한 아버지. 아버지의 마음은 고추밭에 이글대는 뙤약볕만큼 뜨겁고 태양초만큼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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