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옥이 만난 작가] 화가 이영륭...푸른빛 거침없는 붓질, 격동의 현대사를 드러내다
[서영옥이 만난 작가] 화가 이영륭...푸른빛 거침없는 붓질, 격동의 현대사를 드러내다
  • 황인옥
  • 승인 2018.01.17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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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확산된 비구상미술운동
4.19 등 시대상황 작품에 영향 끼쳐
인디고 등 청색 중심으로 색 사용
이영륭작-무위자연2015
이영륭 작 ‘무위자연’.

“조금 전에 전화가 왔어, 이륭(이영륭)이 온대” 2008년 5월 임종을 며칠 앞둔 故유병수 선생이 병실에서 한 말이다. 기다림이 역력하던 고인의 눈빛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다.

이영륭 작가는 10년 전 故유병수 작가가 투병하던 병실로 가 그 곁에 머물곤 하였다. 두 사람은 오랜 벗이다. “결혼시기, 미대 회화과 동기동창, 생김새부터 신장과 체중도 같은데다 같이 추상계열화풍, 이념이나 추구하는 작품세계마저 비슷한 이륭(이영륭), 유병수 두 사람이 30여점을 갖고 10월 하순께 2인 전을 갖는다.” (매일신문.1968.9.25) 2인 전을 함께 하고 서로를 감싸 안던 두 작가는 계명대학교에서 30여년 함께 교편을 잡은 동료교수였다. 병실이 갑갑할 환자의 심정을 헤아려 교외로 나가 쾌청한 하늘을 보여주곤 하던 벗의 다정을 고인이 소천하기 며칠 전에 고백한다. 서로 작은 믿음이 되어 살던 인연도 생사의 갈림길에서는 속수무책이다. 그리움은 오롯이 남은 자의 몫이 됐다. 지우(知友)를 그리는 이영륭 작가는 올해 79세, 곧 산수(傘壽)에 이른다.

작품을 감상하던 눈은 종종 외양을 내면으로 몰고 간다. 직관도 마음으로 향한다. 푸른색이 조화롭던 작품 앞에서 걸음을 멈춘 이유이다. 2016년 4월 29일~ 5월 29일 이영륭 작가의 13회 개인전(갤러리청담)에서 마주한 푸른색 그림이 그랬다. 시각으로 감지된 색채의 느낌은 그 깊이의 끝을 알 수가 없다. 그림이 색을 조형요소로 삼는 한 끝나지 않을 가늠이다. 색은 현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뚜렷한 형상이나 특정한 사물로 대체할 수도 없다. 색의 깊이나 느낌의 척도는 비물질적인 것(마음 또는 정신)에 견주어지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에서 색은 늘 변화무쌍한 심리상태를 동반하는 까닭이다. 긴 침묵을 깨고 12년 만에 연 이영륭 작가의 개인전은 그가 교수직을 퇴임한지 10년이 되던 해이다. 1963년부터 시작된 교직을 마무리한 시점이어서 일까, 50여년의 작품 활동이 평온함을 맞이한 듯하였다.

화면이 머금은 푸른색은 땅에서 하늘로 펼쳐진 여백 같은 여유를 품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국화꽃(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처럼 원숙했고, 일면 괴테의 자전적 소설에 등장하는 베르테르의 푸른 코트색을 연상시켰다. 영화「그랑 블루(Le Grand Bleu)」에서 주인공이 유영하던 고요한 심해의 색 같기도 하였으며, 서양화의 파란색 의상이 풍기는 고결함과도 멀지 않았다. 한국의 정서가 서린 쪽빛에도 가까웠다. 간간이 인디고블루가 버무려졌지만 오방색 중 동쪽을 지키던 청룡이 아침 해를 밀어 올리는 것 같은 힘찬 기운도 감돌았다. 아마도 뉴턴의 광학이론과는 거리가 먼 괴테가 접근한 본질에 주목한 색이었을 것이다. 육신의 기력이 소진된 벗에게 차창 활짝 열어서 보여주던 쾌청한 하늘빛은 아니었을까. 푸른색에 대한 감흥은 아득하고 가물함(玄)에 가 닿는다. 2016년 4월 갤러리청담에서 본 이영륭 작가의 그림 중 푸른색에 대한 소회이다.

예술은 삶을 호흡한다. 삶은 예술로 흔적을 남긴다. “소재는 생활을 떠나서 있을 수 없고, 미술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다”(소재의 벽에 부닥칠 때-서양화가 이영륭씨의 경우.매일신문.1973.3.14)고 한 이영륭 작가가 처음부터 푸른색만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대구가 고향인 그의 작품 활동은 서울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다시 대구에 정착한 196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대사가 반영된 그의 회화는 한국 추상회화의 변천과정과 맥을 같이 한다. 4.19(1960년)와 5.16(1961년)을 겪은 세대로서 동시대의 정치적 혼란으로 빚어진 시대정서는 새로운 조형을 태동시키는데 일조했다. 20세기 초까지 미술계는 이즘(Ism)에 갇혀있었다. 차차 이즘(Ism)이 사라지면서 기계문명과 전쟁의 공포에 대한 반발뿐만 아니라 인간성회복과 법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이영륭 작가의 작품에도 이러한 시대상이 반영된 조형이 비구상으로 드러난다.

1945년을 기점으로 비구상미술운동은 세계적인 추세였다. 한국에는 1950년대에 도입되어 1960년대에 확산된다. 화가는 캔버스위에서 기존의 질서를 부수고 감상자는 감상의 자유를 획득하였다. 미에 대한 평가기준도 서서히 재확립되어 다양한 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이영륭 작가가 작품 활동을 막 시작할 무렵의 현황이다. 그의 1961년 작인 [정토(淨土)]와 [생성(生成)](1969) 등이 그렇듯이 비재현적이고 격렬한 갈색조의 붓질은 이러한 시대적 체험이 투영된 것이다. “(가)그림은 아름다워야 한다. (나)추상회화는 형태의 타파이다. 이 상반된 명제는 현대회화가 지닌 본질적인 고민이다.” (김윤수.대구일보.1967.11.8) 비구상미술이 확산되던 60년대만 해도 시각적 언어는 이 양가적 논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당시 현대미술의 낯선 느낌을 언급한 신문기사 한 대목을 옮겨보면 이렇다.

“최근 2~3년에 우리 화단에 대두하기 시작한 서양화의 새로운 경향에 있어서 특히 주의할 만한 것이 있다. 앵포르멜이라고 통칭하는 다소 난해한 화면들…이들이 회화를 작품세계에 있어서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 기법에만 매여 있는 우리 시대에는 돌연히 나타난 것으로 보일 따름이다. (중략) 이씨(이영륭)의 작품 [혼류]에서 몇몇 문제점을 찾아보면 화면의 초점을 이루는 넓은 회색부분부터 화면의 다각선상을 적절하게 매치한 침착한 흑색부분을 확대되어가는 동일한 톤이 있다….” (새로운 방향-이륭(이영륭) 유화전을 중심으로.영남일보.1961.8.7)

1960년 초부터 이영륭 작가가 실험적인 미술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시대적인 분위기도 한 몫을 하지만 그의 작가적 기질에 더한 추진력이 원동력이다.

서영옥ㆍ미술학박사 shunna9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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