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렇게 그리는지 알 수 없다…의식대로 그릴 뿐”
“내가 왜 이렇게 그리는지 알 수 없다…의식대로 그릴 뿐”
  • 황인옥
  • 승인 2018.05.31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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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옥이 만난 작가> 극재 정점식(1917~2009)
“자연주의 기법으론 시대상 담을 수 없어”
작가철학 알아야 이해 가능한 추상회화
함축적 그림에서 숨겨진 의미 찾아봐야
극재의 서적들.


6월 초순이면 생각나는 기억풍경 한 자락이 있다. 보슬비가 내리던 2009년 6월 10일, 여느 때와 같이 강의노트를 챙겨 들고 고속도로에 차를 올렸다. 해가 질 무렵에야 강의를 마치고 새벽에 달려갔던 그 길로 다시 돌아왔는데 故극재 정점식 선생(이하 극재)은 더 먼 길을 나선 후 돌아오지 않았다. 삶의 경계를 넘으신 것이다. 하늘은 새벽부터 회색빛이었고 비에 젖은 길도 온종일 울고 있는 듯 했다. 3일 후 고인의 발인식이 계명대학교 대명동 캠퍼스 시청각실에서 진행되었을 때, 선생은 영정사진 속에서 말없이 우리를 보고 있었다. 미술대학 교수들과 학생들, 그 외 관계자들이 극재의 영정사진 앞에 한 송이 국화꽃을 바치며 영면안식을 빌었다. 꽃에 둘러싸인 사진 속 극재와 눈이 마주치던 순간 그만 참았던 눈물이 폭포처럼 터져 나온 것은 평소처럼 “그래! 왔나!” 라고 하는 선생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8년 후(2017년 10월) 극재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가 계명대학교 극재미술관에서 진행되었다. 그날 필자는 전시 오픈식에 앞서 고인의 발인식을 했던 시청각실 바로 그 단상에서 ‘극재 정점식의 삶의 궤적’이란 주제로 특별강연을 했다. 긴장되던 그 순간에도 눈물이 와락 쏟아진 건 “그래, 니 왔구나!” 하는 스승의 육성이 들리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강의실과 연구실, 전시실, 그리고 임종을 맞이한 동산병원 병실에서도 극재는 “그래, 왔나!” 라며 반겨주곤 하였다. 계절 마다 바뀌는 풍경을 따라 우리 삶의 풍경도 장면을 바꾼다. 먼 길 나선 스승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제자의 마음이 6월의 풍경처럼 푸르지만 않은 이유는 아련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극재탄생100주년-기념전에
2017년 10월 극재탄생100주년 기념전에 상영한 영상 자료의 한 장면, 강연하는 극재 앞에서 청강하는 필자와 동기생들.


고전주의 미술가들은 고대가 추구했던 미적 기준을 예술적 가치로 여겼다. 그러나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은 고대가 추구한 아름다움을 낡은 가치라며 지적충격을 주었다. 추상표현주의화가들은 고전회화의 구성 원리들을 해체시켰다. 모방을 포기했고 공간감을 없애려고 원근법을 버렸다. 색채의 단순화는 물론 형태표현도 닮음과는 거리를 두었다. 이처럼 자의적인 코드에 가까운 추상회화를 실현한 작가들 중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년)이 아닐까 한다. 그는 모든 사물에 근원적인 형태가 있다고 믿고 비가시적인 세계를 조형했다. 처음에는 선명한 빛과 차분한 색조로 자연 경관을 묘사하였으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구성과 구조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몬드리안에 버금가는 추상표현주의 작가 중 한 사람은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년)이다. 칸딘스키는「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On the Spiritual in Art」(1911)라는 책을 출판할 만큼 예술이 음악과 같은 공명으로 영혼을 울린다고 주장한 작가이다. 칸딘스키는 ‘색채는 건반이고 눈은 망치다. 영혼은 많은 줄을 가진 피아노다. 예술가란 그 건반을 이것저것 두들겨 사람들의 영혼을 진동시키는 사람이다’ 라고 하며 내용과 무관하게 색채가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는 추상의지를 표명했다. 몬드리안과 칸딘스키를 비롯한 추상회화를 추구한 화가들은 예술이 미적 쾌감을 주는 것에 무게를 두지 않는다. 추상미술은 형상이 아닌 원리가 중요했고 그들의 예술철학을 모르면 작품 이해는 한계에 부딪힌다. 추상미술을 눈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극재는 일찍이 자연주의식 화법을 버리고 추상미술을 추구한 화가이다. 글로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광복이 되어 돌아온 대구 서양화단에는 서동진, 박명조, 주경, 서병기, 배명학 같은 자연주의 계열의 선배화가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니, 나와 같은 이단적인 존재는 감히 여기에 어울릴 수는 없었고, 1950년대를 기다려야 했다.” (중략) “오늘날의 화가는 전습적인 수련에서 익힌 기교나 방법을 거부하고 있다. 그것은 19세기 말에 이미 몰락한 자연주의식 형식인데, 이것으로는 오늘날의 시대의식을 담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중략) “브라크의 파피에 콜레(Papier colle)나 에른스트의 프로타쥬(frottage)와 데칼코마니(decalcomanie), 달리의 데페이즈망(depaysement), 미로의 칼리그래피(calligraphy), 뒤샹의 레디메이드(ready-made)의 오브제, 폴록의 드리핑(dripping), 워홀의 광고 프린팅(printing) 등은 그것을 뜻한다. 이들 새로운 기법을 원용한 회화는 그 자연적인 섭리에서 스스로 조성한 이미지의 세계를 열어주고 때로는 사물 속에 숨어 있던 잠재적인 기억이나 꿈을 찾아내기도 한다.” (극재 화집, 美術公論社, 2008, pp.80~81)

극재는 서구 추상회화의 논리를 수용하면서도 일면은 그 궤를 달리하는 작품세계를 펼쳤다. 극재의 작품세계를 좀 더 자세히 탐색하기 위해 그의 육성이 녹음된 파일을 찾아보았다. 극재는 2003년 1월 8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예술의지를 피력했다. <화가의 경험>이라는 제목으로 녹음된 육성파일을 통해 극재의 예술세계를 좀 더 지근거리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나의 그림은 나의 호흡과 감정, 손놀림, 심리적인 작용이 한데 어우러져서 나오는 것이다. 예술은 경험한 의식을 작용시키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는 감정 속에 오늘날의 현실과 처한 여러 가지 문제, 그리고 심리적인 고민이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내가 왜 그렇게 그리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작가와 독자들의 경험이 다르고 보는 각도도 다르지만 근본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창작을 경험한다는 것, 즉 재 경험을 하는 것은 관람하는 사람의 수준과도 연관된다. 수준에 맞지 않으면 눈에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 수준에 올라가야만 보이는 것이 있다. 나보고 보편적인 회화를 왜 하지 않느냐고 하는데, 예술을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면 예술정신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굉장히 중대하다. 물질이 앞선 사회에서는 심리적인 것을 간과한다. 어쩌면 독자들이 망각하고 있는 현실일 것이다. 전람회를 할 때 관객이 내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때 감동은 이해와는 다른 것이다. 예술작용은 경험과 색의 부딪힘이 있을 때 전기가 통하듯 상대와 통하는 것이다.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 있을 때 불타오르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은 참 어려운 것이다.”

그의 육성은 극재의 예술이 고전주의식 잣대로는 이해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그렇다고 서구 추상표현주의식 틀에 극재의 화법을 끼워 맞추는 것 또한 무리가 있다고 판단된다. 이 경우 아들러의 주장은 참고할만하다. “같은 행위라도 경우에 따라서 범죄가 되기도 하고 범죄가 되지 않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범죄를 저지른 개인의 상황(context)을 아는 것이다. 곧 범죄자를 범죄로 이끈 개인적 삶의 목표를 이해하는 것이다. 삶의 목표를 이해하면 각각의 행동을 그림 전체에 속해 있는 조각들로 이해하게 된다. 이때 각각의 행동 이면에 숨어 있는 의미들을 포착해 낼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이 조각들을 연구함으로써 그림 전체를 더 잘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알프레드 아들러, 행복해지는 관심, 리베르, 2015, p43.)

시처럼 함축적인 극재의 그림에서 간명함은 작품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나타나는 표현형식이다. 간명한 형식 속에 내재한 함축적인 의미는 극재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단서가 될 것 같다. 더하여 극재가 추구한 정신적인 것(또는 심리적인 것)의 표현은 일종의 문학적인 것과 동류라는 것도 참고할 사항인 듯하다. 미술학박사 shunna9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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