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 추노(推奴)
<대구논단> 추노(推奴)
  • 승인 2010.01.24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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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흥(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작년 `선덕여왕’의 인기는 새해 들어 `추노’로 이어지고 있다. `추노’는 훈련원 교관에서 말을 관리하는 노비로 전락한 태하(오지호 분), `도련님’에서 도망 노비를 잡으러 다니는 추노꾼으로 변한 대길(장혁 분), 이와 반대로 노비 언년이에서 양반집 규수로 새 삶을 살고 있는 혜원(이다해 분)이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선덕여왕’에서 미실(고현정)의 묘한 웃음이 매력이었다면, `추노’에서는 어느 일간지 신문의 이야기처럼 거대한 스케일, 수려한 영상, 스릴러적 쾌감, 빠른 속도감, 장쾌한 액션, 노비가 주인공인 무겁지 않은 이야기와 함께 여심을 홀리는 근육남들, 질퍽한 육담, 조연들의 감칠맛 연기를 매력으로 들고 있다. 물론 가족들이 같이 보기에 심한 대사나 장면들이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지적되었다.

실제 조선시대에 도망간 노비를 잡는 노비추쇄도감(奴婢推刷都監)이라는 기구가 있었다. 이 기구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공노비(公奴婢)로서 도망한 자를 색출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관서이다. 물론 양반의 사노비(私奴婢) 역시 자신이 직접가거나, 수령으로 나간 친인척이나 추노꾼을 통하여 노비를 추쇄하였다.

공노비는 국가에 노동을 제공하거나 아니면 공물(세금)을 납부한다. 그러나 그 역이 과중되자 도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 말 권문세가들이 강탈한 토지와 노비를 조사하던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도 비슷한 기구였다. 조선 건국이후에도 도망 노비의 추쇄는 지속되어 태종대 12만여 명의 공노비가 확보되었다. `

경국대전’에서는 공노비에 대해 3년마다 추쇄하여 약식 명단을, 그리고 20년마다 정식 명단을 작성해 본읍(本邑)·본도·본사(本司)·사섬시(司贍寺)·장례원·형조·의정부에 비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조선 건국 후 150년 동안 여섯 차례의 추쇄로 그쳤으며, 그 뒤 100여 년 동안 노비추쇄사업은 하지 않았다.

양난 과정에서 제일 먼저 불태워진 것은 노비 문서였다. 그들은 재산으로 취급되었지, 인간으로 살지 못하였다. 그들을 헤아리는 방법도 몇 사람(人 名 員)아닌 몇 구(口)로 헤아리며, 재산으로 취급되었다. 그런 그들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살고자 도망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노비 추쇄가 본격화 된 것은 1655년(효종 6)으로 부족한 국가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찾은 방법 중 하나였다. 당시 등재된 19만여 명의 공노비 중 실제 세금을 납부하는 자는 2만 7천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국가에서는 나머지 16만 명의 노비 수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생원, 진사 이상을 지낸 사람 중 자수자는 용서해 주고, 적발자는 다시 노비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벌써 세대가 흘러 권력자가 된 경우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송익필(宋翼弼)이다. 그의 할머니는 안돈후와 비첩(婢妾)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庶女)였으므로 그의 신분도 서얼이었다. 아버지 사련은 안돈후의 손자 처겸(處謙)을 역모로 몰아 안씨 일가를 멸문시킨 공으로 당상관에 올랐다.

그러나 얼마 후 죄상이 밝혀지면서 그는 과거를 볼 수 없었다. 이후 율곡 이이·성혼과 교유하면서 당대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문명을 날렸다. 율곡 사후 동인들과 안씨 일가에서 그의 신분을 밝히면서 자신의 집 노비로 다시 돌려 달라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 결과 그의 형제들은 모두 안씨 집안의 노비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서인 제자들의 보호를 받으며 살았다.

그는 `서인의 모사꾼’이라는 칭호답게 정여립이 모반을 꾀한다고 거짓으로 꾸민 기축옥사(己丑獄事)의 배후조종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의 사후 서인 제자들이 끈질긴 요구로 영조대 신분이 환원되었다. 그의 제자로는 예학의 대가 김장생 등이 있으며, 김장생의 제자가 김집-송시열, 송준길 등으로 이어지는 서인 권력자들이다.

물론 체포를 독려하는 차원에서 노비수가 가장 많은 수령에게는 상을 준 것은 당연하다. 효종대 노비 추쇄는 당시 목표로 삼은 10만여 명 중 1만 8천여 명 정도에 그쳤다. 그로부터 약 150년 후 국가에서는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여 공노비를 혁파하였다. 그리고 약 100년 후 사노비도 해방되었다.

추노꾼은 누구를 위한 사람들인가. 그들은 당대 일부 양반과 권력자들을 위한 자들이다. 이들 권력자들은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과 연관된 사람은 잡지 않는다. 그들이 잡으려는 자는 도망 노비이다. 그런데 이들 도망 노비가 오늘날 벼랑 끝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들을 상징하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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