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변(多變)의 반의어(反意語)
다변(多變)의 반의어(反意語)
  • 승인 2018.09.16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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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윤 시인
의사소통의 방법은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통(不通)하는 경우는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매순간마다 선택해야 할 일들은 많은데, 신속하게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무산되고 만다. 휴대폰을 켜놓은 상태에서, 뭔가를 누르지 않으면 액정이 금방 꺼져버리고 만다. ‘별 볼일 없으면 꺼’라는 식이다. 물론 오랫동안 꺼지지 않게 하는 기능도 있지만, 이는 기계의 수명을 단축하기 때문에 함부로 설정할 수도 없다. 가정 내에서도 이런 경우가 많다. 아버지가 퇴근을 해서, 아이방문을 열면 아이는 ‘왜요?’라고 묻는다. 그냥 아이가 보고 싶어서 방문을 열었던 아버지는 머쓱해져서 문을 닫아주고 돌아선다. 등 뒤에는 ‘상식(?)’을 몰랐던 남편을 바라보며 혀를 차는 아내가 서 있다. 이미 그녀가 수차례 당했던 일이기 때문에 남편의 허무함을 공감하면서 말이다. ‘볼일’도 없이 아이를 찾는 건 말도 안 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아기가 태어나면, 울음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다. 소리를 통한 첫 번째 의사표현이다. 그리고 주위의 소리를 듣고, 눈을 떠 시각적인 학습을 하게 된다. ‘엄마’를 부르며 의사소통을 시도하고, 그러다가 점점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성장을 한다. 요구에 대한 일방적인 수용으로부터, 때론 부모로부터 요구를 거부당하기도 하며 ‘협상’을 하게 되는 능력을 키우는 것도, 관계를 형성하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먹을 것’만 요구하니 받아들여지기 쉬우나, 점점 ‘하고 싶은 것’이 많아지면서 부당한 요구도 하게 된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이 부당한 요구를 부모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아이의 가치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 후 학교를 가게 되면서 문자를 통한 의사소통을 익히게 된다. 받아쓰기를 통해서 정확한 맞춤법을 익히고, 유의어와 반의어를 배운다. 비슷한 의미들의 단어를 묶어서 학습하기도 하고, 반대되는 단어들을 숙지하면서 구체적인 소통을 한다. 흔히 반의어(反意語)는 반대말이라고도 부른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반대말이다. 낮의 반대말은 밤이고, 소년과 소녀 또한 서로가 상반되는 반의어라고 배웠다. 이런 이원적(二元的)인 구조의 이해는 상당히 위험하지 않을 수 없다. 반대라는 말은 상반되는 개념이다. 물론 다양한 형태의 더 많은 단어들을 익히는 데는 이만한 효과적인 학습방법도 없다. 연관학습 방식을 통해서 하나의 단어를 맞대어서 이해하면 두 배의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바른 방법이 아닐 수도 있다. 대치하는 개념으로 자리 잡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치(對峙)한다는 것은 적으로 인식할 때 쓰는 표현이다. 남자와 여자는 적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야할 이성(異性)일 뿐이다. 어느 한쪽의 존재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로 밤과 낮은 규칙을 통해 질서를 유지하는 자연현상이다. 반대의 개념이 아니라 공존의 개념이어야 한다. 반대말 또는 반의라는 이원적인 사고가 자리 잡으면, 어른이 되어 공생의 개념을 잠식하고, 뜻이 다르면 적으로 간주하는 우(愚)를 범할 수 있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한다. 다변화(多變化)하는 국제정세에 신속하게 대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대처하는 것이다. 정답의 반대말은 오답이다. 그럼 정답은 하나일까? 다양한 형태의 정답들에 대해서 반의어는 무엇이라고 할 건지 궁금하다. 다양한 형태의 오답이라고 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여당의 반대말은 야당이다. 반대말이라는 말 자체가 사라져야 한다. 다원적(多元的)인 사고를 가져야 다양한 이해를 할 수 있고, 이에 대한 의사소통의 전부를 기대해 볼 수도 있다.

무위도식(無爲徒食)이란 말이 있다.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놀고먹는 사람을 일컬을 때 흔히 썼던 표현이다. ‘썼던’이라고 과거형으로 쓰는 이유는, 요즘은 거의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자어이기도 하지만, 무위도식하는 이가 드물다. 하물며 노숙자들조차 끊임없이 자리를 옮겨 다녀야만 생존할 수 있는 세상이다. 무위(無爲)하면 도식(徒食)할 수가 없다. 몽상을 즐기는 필자가 살아가기에는 힘겨운 세상임에는 분명하다. 사람들이 관용을 베풀 여유도 없다. 필자가 어렸을 적에는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어머니가 ‘뭐해?’라고 물어도 매번 대답은 ‘그냥’이었지만, 이를 두고 탓한 적이 없으셨다.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해주셨기 때문이라고 아직도 믿고 있다. 어머니도 걸레질을 하다가 가끔, 그냥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던 까닭이었으리라. 믿기 어렵겠지만, 요즘 하늘을 우러러보는 이가 드물다. 기상청에서 대신 살펴봐주고, 매 시간마다 친절하게 날씨를 예보해 주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직 하늘과 땅은 반의어가 아니다. 하늘과 땅의 조화로부터 ‘사람’이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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