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의 현실
판사의 현실
  • 승인 2018.10.18 21:5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병진
한국소비자원 소송지원변호사
일반인들이 보기에 판사는 재판에서 무게를 잡고 격무에 시달리지 않는 고상한 직업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판사들은 격무에 시달리고 있고, 국가의 예산은 아무래도 행정부와 힘 있는 국회의원들에게 집중되다보니 법원 예산 부족으로 판사를 함부로 증원할 수도 없다.

소액사건을 담당하는 판사의 한 달 생활을 살펴보자. 대부분의 판사는 1주일에 한번만 재판을 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4일은 사무실에서 한가하게 놀거나 사무실 밖으로 나가서 적당히 시간을 보낼까. 전혀 아니다. 사무실에서 사건을 검토하고 판결문을 작성하는 일을 한다. 소액 사건 판사는 1일의 재판기일에 적게는 100건 많게는 200건의 사건을 처리한다. 1건의 사건 기록이 50페이지 정도 되면 1주일에 5천 페이지 내지 1만 페이지의 사건 기록을 읽어보고 재판 당일 어떤 질문을 하고, 어떤 점을 확인할지를 결정하고 또 판결문을 작성하는 것이다. 하루 기준으로 최소한 1천 페이지 이상은 기록을 읽어야 한다.

이제 재판 당일 상황을 보자. 오전 재판 2시간, 오후 재판 4시간 정도를 한다. 1시간에 약 20건 ~ 30건의 재판으로 하고, 10분에 3~5건을 처리하여야 한다. 그러다보니 당사자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잘 들어줄 수 없는 구조이다. 그럼 판사를 더 뽑으면 되지라고 생각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법원의 주머니 사정은 넉넉하지 않다.

이렇게 초스피드로 재판을 진행하지만 경우에 따라 한 사건을 10~20분 넘게 진행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하다보면 10시에 시작한 재판이 점심시간인 12시 이전에 끝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런데 또 오후 2시의 재판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무려 100건 전후로 엄청나다. 오전 재판이 1시 넘어서 끝나고 판사가 점심을 제대로 먹으면 2시 재판 시간을 맞출 수 없으므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법정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너무 피곤하다.

이렇게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한 피곤한 상태로 다시 오후 재판을 시작하다보면 판사도 사람이므로 법정에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당사자에게 짜증을 낼 수도 있지만 이를 전혀 모르는 당사자는 정말로 불쾌하게 법원 문을 나서면서 ‘왜 판사가 공연히 신경질을 부리나, 많이 배웠다고 유세를 하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일부 당사자들은 판사가 자기 이야기를 잘 경청하여주고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차분히 법률적으로 왜 책임을 지고 재판에 져야 하는지를 설명할 경우 재판에는 지지만 잘 이해하고 마음이 풀리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만 이는 정말로 예외적이고 또 판사가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놈의 시간 부족으로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재판과정에서 판사는 변호사가 없는 당사자들 중 법률적인 주장을 잘 하면 이길 수 있는 사건인데 재판 준비를 잘 하지 못하여 억울하게 패소할 수 있는 사건에 대하여 ‘변호사를 선임하여 잘 준비하여 보세요’라고 조언을 하면 당사자는 판사가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모르고 이를 오해하여 ‘판사가 노골적으로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는다고 짜증을 냈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판사가 중립적인 지위에서 당사자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으면 당사자들은 판사가 거만하고 친절하지 않다고 오해하고 돌아갈 수도 있다. 이래저래 힘들다.

하여튼 그 날 재판을 무사히 넘긴 판사는 한숨을 돌리지만 당장 내일부터는 다시 다음 재판을 위한 200건 소송의 재판 준비를 한다. 밤늦은 시간에 법원에 불이 켜져 있다면 대부분 야근을 하는 판사의 방이라고 짐작하면 틀림없다. 그래도 기록을 다 검토하지 못하였다면 주말에 출근하여 나머지 기록을 본다. 이제 1주일이 지났다. 다음 일주일도 똑 같은 생활의 반복이다. 그래서 판사는 격무에 시달린다.

영화나 드라마로 돌아와 보자. 판사는 법정에서 무게를 잡고 뒤로는 변호사와 술을 마시고 접대를 받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영화에서 판사가 계속 열심히 일만하면 재미가 없을 것이므로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는 점은 100% 이해되지만 일반인들이 많은 판사들이 그렇게 생활하는 것으로 오해할까 걱정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일부 판사들이 영화보다 더 심한 짓을 하여 묵묵히 열심히 일하는 평범한 판사들의 이미지까지 망칠까 심히 염려된다.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