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부심과 자만심
자부심과 자만심
  • 승인 2018.10.30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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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봉조 수필가
80대 중반의 어느 시인은 문학 강의 도중 커피로 목을 축이며, “여태까지 커피보다 맛있는 음식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밝은 표정을 지으셨다. 백배 공감이 가는 말씀이었다.

나 역시 매일 커피를 가까이하며, 기꺼이 그 향에 빠져들고는 한다. 나와 커피의 만남은 어언 50년 세월이 지났다. 한 세기의 절반을 변함없이 좋아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가. 그렇게 커피를 좋아하다가 가까운 문화센터에 다니며 바리스타(Barista) 자격증까지 취득하게 된 것이, 벌써 5년 전 일이다.

그날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핸드드립(Hand drip) 커피를 내리며 여기저기 원두를 사러 다니다보니, 커피에 대한 종류와 효능과 가공 및 추출과정 등 다양한 정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커피 내리는 법을 묻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기다렸던 듯 반갑게 알려주는 등 커피로 인한 즐거움은 기대이상으로 나의 생활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다.

적당량의 커피는 심장질환이나 당뇨를 예방할 수 있고, 수명을 연장하는 효과도 있다는 등의 연구결과가 많이 나와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감정 조율의 효능이 무엇보다 크다고 해야겠다. 기분 좋은 일이 있거나 어려운 문제로 마음이 우울할 때, 유난히 하늘이 높거나 추적추적 비가 내릴 때, 오래전 만났던 친구가 그리울 때나 머리가 어지러울 때도 커피의 힘으로 많은 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운동 삼아 길을 걷다가 아는 언니가 ‘분위기 괜찮은 카페가 있다’며 발길을 이끌었다. 무심코 따라 들어간 카페 입구에는 제법 널찍한 공간을 커피 볶는 장비가 차지하여, 고소하고 은은하게 스며드는 향이 민감한 코로부터 가슴과 뇌리까지 순식간에 호기심으로 채워가며 미소가 번지게 했다. 과연 멋진 것 같았다.

텅 빈 홀 한쪽에서 한가로이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고 있던 카페 주인은 반색을 하며 볼륨을 낮추었다. 음악이 좋다고 하니, 간혹 싫어하는 손님이 있다며 취향을 물어보기도 했다. 덧붙여 스피커가 굉장히 비싼 제품이라며, 손님이 없는 밤에는 영화를 보는데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자랑스러워했다.

로스팅(Roasting)에 관심을 보이며, 원두를 사고 싶다는 말을 했다. 아는 커피를 말해보라기에, 에티오피아, 케냐,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브라질 등 자주 애용하는 커피의 원산지를 칭찬받은 어린아이처럼 조잘거렸다. 그런데, 돌아온 반응이 의외였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평범한 품종일 것이라며, 여기서는 그런 것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스페셜티’만을 취급한다고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파푸아뉴기니 마라와카 블루마운틴’ 표식이 붙은 병이 있기에, 이것도 좋아한다며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반가워했다. 역시, 내가 아는 그 블루마운틴은 ‘AA’ 등급일 것이라며, 이것은 ‘AAA’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미간이 찌푸려지면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교사(反面敎師)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부정적인 면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는 것을 말한다. 혹시 나도 친구나 지인들에게 커피를 내려주거나 커피 이야기를 하면서, 혼자 잘난 척 떠들어대는 무례한 행동을 범하지는 않았을지….

내가 가진 것 또는 내가 아는 것만이 최고라는, 반감이 가는 언행을 의외로 자주 만나게 된다. 행여나 그것을 자부심이라 생각한다면, 명백한 오산이다.

자부심(自負心)이란, 자신 또는 자기와 관련된 것에 대해 스스로 그 가치나 능력을 믿고 당당히 여기는 마음이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자랑하며 뽐내는 자만심(自慢心)을 넘어 건방지고 교만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자부심과 자만심, 비록 한 글자 차이지만 듣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위에 자신의 것을 양념처럼 살며시 얹어준다면 상대방의 기분도 얼마나 뿌듯할까. 스스로 애써 낮출 필요도 없지만, 상대를 먼저 깎아내려야 자신이 높아진다고 기대한다면 어리석은 생각이다.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몇 안 된다. 이 가을, 골목 어귀마다 커피의 향이 번지듯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낮고 푸근한 향이 소리 없이 번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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