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모이', 열 사람의 한 걸음이 그은 역사의 한 획
'말모이', 열 사람의 한 걸음이 그은 역사의 한 획
  • 배수경
  • 승인 2019.01.10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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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지키기에 애썼던 사람들 이야기 ‘말모이’
일제강점기시대 조선어학회
조선말 큰사전 제작 과정 그려
웃음·감동 욕심 낸 이야기
중간 중간 지루한 부분도
말모이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8일, 경성역 창고에서는 몇 년간 행방을 알 수 없어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2만 6천500여장 분량의 ‘조선말 큰사전’ 초고가 발견된다. 당시 신문은 ‘사람따라 말까지 옥살이, 창고에 갇혔던 우리사전, 해방된 원고’라며 이 소식을 전한다. 이 원고를 토대로 1957년까지 총 6권의 ‘조선말 큰 사전’이 완간된다. 영화 ‘말모이’는 ‘어떻게 그 원고가 경성역 창고에 있었을까’하는 의문에서 출발해 가상의 인물들과 에피소드를 더했다. (실제로는 조선어학회 사건의 재판 증거물인 원고가 일본의 갑작스러운 패망으로 창고에 방치되어 있다 발견된 것이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각본을 쓴 엄유나 감독의 첫 연출작이다. 일제강점기를 그린 기존 영화들이 독립군의 항일운동 등을 주로 다뤘다면 이 영화는 조선사람이 조선말 사전을 만드는 것이 죄였던 시절. 우리의 말과 마음을 모아 사전을 펴내기 위해 애썼던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말모이’는 1911년 주시경 선생이 만들다 미완성으로 남은 우리말 사전의 원고이기도 하고 후에 조선어학회에서 전국의 말들을 모으기 위해 펼쳤던 작전의 이름이기도 하다.

전과자 건달 김판수(유해진)는 다니던 극장에서 해고되고 아들의 밀린 월사금을 마련하기 위해 소매치기를 한다. 이 과정에서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과 엮이게 된다. 그런 그가 조선어학회의 심부름꾼으로 나타났다. 안그래도 마뜩지 않은데 하필이면 까막눈이라니. 악연으로 시작된 두사람의 인연은 뻔하면서도 흥미롭다.

한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말과 글부터 먼저 사라지게 하는 것이 첫 순서였다. 일본이 우리의 말과 글을 없애고 창씨개명을 강요했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말과 글이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듯 쓰고 있는 우리 말과 글은 잃기 전까지는 그 귀함을 알 수 없는 공기 같은 것이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말이 있다. 말이 있는 곳에 뜻이 있으며 뜻이 있는 곳에 독립의 길이 있다” 조선어학회에서 그토록 우리 말을 지키기 위해 애썼던 것도 같은 이유다.

“10년동안 돈을 모아야지, 말은 모아 뭐해요?” “도시락이든 벤또든 배만 부르면 되지 뭐가 중요하냐”고 생각하던 김판수가 어느새 말과 글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고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조선어학회의 일원이 되어 활동하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한권의 사전이 만들어지기까지는 그 시대의 지식인들뿐 아니라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힘이 보태져서 가능한 일이었다라는 것을 영화를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영화 속 류대표의 입을 빌어 전해지는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크다”가 주는 울림도 꽤 크다.

처음부터 유해진을 염두에 두고 각본을 쓴 까닭일까? 김판수는 유해진 그 자체이다. 물론 그것이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하다. 늘 보던 스타일의 연기에 식상해질 법도 하지만 그이기에 가능한 맛깔나는 대사와 행동이 무거운 이야기를 가볍게 지켜볼 수 있게 만든다.

엉덩이와 궁둥이가 어떻게 다른지 김판수만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한글을 익힌 후 거리의 간판을 읽고 ‘운수 좋은 날’을 읽으며 오열하는 모습도 재밌다. 류대표 역의 윤계상도 전작 ‘범죄도시’의 악랄한 보스 장첸에서 벗어나 친일파 아버지와 대립하며 고뇌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연기한다. 여기에 김홍파, 우현, 김태훈, 김선영 등 연기파 배우들이 조연으로 등장한다. 김판수의 아들, 딸을 연기한 조현도, 박예나 등 아역배우들의 연기도 눈여겨 볼만하다. 영화는 웃음과 감동을 다 움켜쥐려고 욕심을 낸 까닭인지 중간중간 지루해지는 부분들도 있다.

서울 종로구 일대를 걷다보면 우리가 잘 아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비롯해 모든 간판이 한글로 되어있는 거리를 가끔 만난다. 우리나라 거리에서 만난 우리말 간판이 낯설게 느껴져 행인들은 스마트 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도 한다. 우리말 간판이 ‘당연한거 아니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잠시 자신이 서있는 거리의 간판들을 한번 올려다보기를. 당연한 듯 여겼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될 것이다. 영화 ‘말모이’를 보고 잠시나마 ‘어떻게 지켜온 말과 글인데’라는 마음으로 관객들이 스스로를 잠시나마 돌아보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겠다.

영화의 엔딩크레딧과 함께 화면가득 펼쳐지는 말모이 원고는 관객을 숙연하게 만든다.

배수경기자 micbae@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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