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적 의미 ‘고려 공민왕 때
탐라의 목호들이 일으킨 반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될까
당시 탐라 섬사람들의 시각에서 보자면
고려·몽골·명, 모두 ‘육지’에 속하는 셈
그들 입장에서 ‘우리’ 범위 생각해 보고
645년 전 역사 새롭게 바라볼 것을 제안
대화 중에 이런 얘기를 언뜻 내비쳤더니, 누군가 그게 제주 특유의 ‘괸당’문화라고 알려줬다. ‘괸당’은 친척, 이웃을 포함해 네 일과 내 일의 구분이 없을 정도로 끈끈한 연대감을 공유하고 있는 사회적 집단을 가리키는 말인 듯했다. 무뚝뚝하고 외지인에 대해 경계심 많은 제주도 사람들이지만, 한 번 괸당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비록 육지 출신이라도 끝까지 돌봐주고 지켜준다는 것이다. 척박한 환경과 가혹한 수탈 속에서 생존을 위해 가까운 사람들끼리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가 이런 문화의 배경이 됐으리라 짐작했었다.
제주에 관해 또 하나 놀랐던 것은 한자 사전의 풀이에서 말(馬)에 관한 다양한 우리말을 발견했을 때였다. 가라말(털빛이 온통 검은 말), 절따말(몸 전체의 털색이 밤색이거나 불그스름한 말), 부루말(흰말), 월따말(털빛이 붉고 갈기가 검은 말) 등 낯선 말들은 몽골어에서 유래한 것이라 했다. 고려 때 원나라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말을 길렀다는 얘기는 국사 시간에 들었지만, 그때 들어온 몽골어가 각종 말의 이름으로 남아 이후에도 오래 통용되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제주의 괸당과 몽골어에 대한 의문을 성근 상상으로 덮어두고 지내던 중, 최근 발간된 역사 만화 ‘목호의 난, 1374 제주’(정용연 지음, 딸기책방 2019)가 좀 더 구체적인 이해를 제공해 주었다. 이 책은 또 645년 전 제주에서 벌어진 참혹한 사건을 ‘육지 사람’의 시각에서 벗어나, 당시 제주 사람들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목호는 오랑캐 목자란 뜻으로 제주에서 말을 기르던 몽골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목호의 난은 백과사전에서 “고려 공민왕 때 탐라의 목호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정의하고 있다.
작품의 도입부에서는 제주 애월 바닷가 최영 장군과 김통정 장군 석상 사이에 세워진 비석을 보여준다. 거기 새겨진 ‘애월읍경은 항몽멸호의 땅’이란 문구는 ‘애월이 몽골에 맞서고 오랑캐를 없앤 땅’이란 뜻인데, ‘오랑캐를 없앤다’라는 말에 의문을 제시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공민왕은 원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부원세력을 처단하고 쌍성총관부를 공략해 철령 이북의 땅을 회복한다. 그 후 원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중원의 새 주인이 된 명나라 황제는 고려에 탐라의 좋은 말 2천 필을 바치라고 요구한다. 공민왕은 어쩔 수 없이 관리를 보내 말을 구해오게 하나, 목호들은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 결국 왕은 최영으로 하여금 목호를 토벌하고 탐라를 다시 고려에 복속시킬 것을 명한다.
1374년 8월, 314척의 고려 전함이 2만 5천600명의 군사를 싣고 제주 앞바다에 나타난다. 100년전 여몽연합군이 삼별초를 치기 위해 동원한 배의 두 배, 당시 제주민의 수와 맞먹는 병력이 대대적인 토벌에 나선 것이다. 목호들은 필사적으로 항전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서귀포 해변까지 밀려난 그들은 배수진을 쳤으나 크게 패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배를 타고 범섬으로 들어갔다. 함선들이 작은 섬을 에워싸자 그들은 최후를 맞는다. 한 달여 만에 반란은 진압됐다. 그 후 잔존세력의 반란도 진압되고 변발을 했던 섬사람들은 상투를 틀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섬 인구의 절반이 살육당했다.
애월 해변의 비석으로 돌아가자. 김통정 장군은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이었던 삼별초를 이끌고 끝까지 몽골군에 맞서 싸운 사람이며, 최영 장군은 몽골인 목호의 난을 진압한 장군이다. 단일민족 국가라는 시각에서 보자면 몽골이라는 이민족에 맞선 두 장군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겠지만, 시대적 맥락을 짚어보면 뭔가 어색하다. 김통정 장군은 고려왕의 명을 받은 김방경을 총사령관으로 한 여몽연합군에게 맞선 삼별초의 우두머리고, 최영 장군은 고려왕의 명을 받아 몽골인을 몰아냈다. 고려왕실은 오로지 몽골의 강압 때문에 삼별초를 쳤던 것일까?
더구나 탐라 사람들의 시각으로 보자면 고려나 몽골이나 명나라나 모두 ‘육지 것’들이었다. 탐라는 고대국가로 서지 못하고 주변 세력들에게 수탈, 약탈을 당해오다 고려에 편입됐다. 그 후 몽골인들이 들어왔다. 섬사람들에게 신라, 백제, 고구려, 왜구, 고려, 몽골 모두 귤이나 전복 같은 특산물을 빼앗아가며 못살게 구는 존재였을 것이다.
오히려 침략자도 들어온 몽골인들은 말을 기르며 100년 동안 같은 땅에서 살았다. 세대가 이어지며 자연히 피와 문화가 섞였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석나리보개는 몽골인의 후예이며 버들아기는 유배 온 고려 관리의 딸이다. 그들은 뿌리는 뭍이었으나 섬사람으로 자라온 세대다. 석나리보개에게, 버들아기에게, 더 나아가 당시 섬사람들에게 과연 ‘우리’의 범위는 어디까지였을까. 목호의 난은 우리의 승리였을까, 우리의 패배였을까, 아니면 ‘육지 것’들의 난장판 속에서 억울하게 당한 ‘괸당’들의 죽음이었을까, 600년 전의 4·3이었을까.
정용연 작가는 2013년 자기 가족의 역사를 들려준 ‘정가네 소사’로 부천만화대상 우수만화상을 수상했다. 5회에 걸쳐 무크지에 발표했던 이 작품을 5년간의 수정작업을 통해 이번에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이 작품은 역사의 흐름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보여주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구체적 삶을 통해 역사를 되돌아보게 한다.
김광재기자 contek@idaeg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