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무위당학교 대표 신영철 “더불어 사는 삶 실천한 ‘무위당 장일순’ 정신 이어갈 것”
대구무위당학교 대표 신영철 “더불어 사는 삶 실천한 ‘무위당 장일순’ 정신 이어갈 것”
  • 황인옥
  • 승인 2019.03.03 20:5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세기 후반 농민·노동·사회·정치…다방면서 활동한 장일순
시대 아픔 함께한 정신 이어받아 사단법인 ‘무위당사람들’ 설립
대구학교 화두는 어린이, 대안교육, 사회적 경제, 협동조합, 공생
쪽방촌 장판 교체·간판 제작하는 등 낮은 곳에서 그의 가치 실현
상반기 생명·평화 다양한 주제로 강좌…하반기 강좌도 준비 중
무위당 장일순 선생
무위당 장일순 선생

 

무위당 장일순(1928~1994) 선생은 20세기 후반 시대정신의 표상이었다. 욕망과 암투가 난무하던 시절에 정의와 진실의 편에서 투쟁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중립화평화통일론을 주창했다가 5ㆍ16쿠데타 세력에 의해 투옥되고, 가난한 농민과 광부들을 살리고자 자발성에 기초한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시작하고, 지학순 주교 등과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투쟁하고, 농민ㆍ노동운동의 저항을 넘어 생명운동을 전개했다. 자연주의 사상의 정수인 생산자인 농민과 도시의 소비자 모두를 살리는 ‘한살림’ 창립자이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정의 편에 섰고, 공동체 상생을 위한 생명의 삶에 헌신했다. 실천에는 강단이 넘쳤고, 삶은 치열했다. 세상의 척도보다 정의의 가치와 자연의 이치를 따라온 삶이었다.

대구무위당학교 운영자인 신영철 대표는 대구지역에서 어린이, 대안교육, 공동체, 사회적경제, 협동조합, 조화와 공생 등의 화두의 삶을 살아왔다. 독재정권이 득세할 시절에는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고, 더불어 행복한 공동체 건설에 힘을 보태고자 했다. 신 대표와 무위당 선생의 만남은 그들의 삶이 추구한 가치라는 지점에서 교집합이 있어 보인다.
 

학교1
대구무위당학교 강의 모습.

◇ 무위당 선생의 뜻을 잇는 대구무위당학교

올해 대구무위당학교는 지난 1월 10일부터 31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대구 남구 대명동 세아센터(5층) 공간이음에서 두 번째 강좌를 마무리했다. ‘우리도 모르는 우리’라는 주제로 기업, 생명, 평화, 건축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강좌는 △성심당을 통해 바라본 ‘기업’(김미진 이사) △해월의 삶을 통해 바라본 ‘생명’(조성환 박사) △화쟁, 화엄을 통해 바라본 ‘평화’(전호근 교수) △주택이 아니라 주거로 바라본 ‘건축’(김경호 대표) 등으로 진행됐다. 올해 하반기에 또 한 번의 새로운 강좌를 준비하고 있다.

 

대구무위당학교 신영철 대표
대구무위당학교 신영철 대표

 

“대구무위당학교는 모심과 섬김의 삶을 산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통해 다른 시선, 다른 생각을 들여다보고 우리도 모르는 우리를 성찰해 보는 시간으로 진행했다.” 최근 만난 대구무위당학교 신영철 대표의 말이다.

신 대표는 인터뷰 내내 무위당 선생에 대한 존경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만큼 무위당이 신 대표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크다는 반증이다. 그가 무위당 선생을 한마디로 “모두를 살리는 모심과 섬김의 삶을 산 현인”으로 평가했다. “20대 초반에 세계를 하나의 연립 정부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던 ‘원월드 운동’에 참여했던 아인슈타인과 편지를 주고받을 만큼 무위당 선생의 세계는 넓고 깊었다.”

무위당은 사회운동가이자 교육자이며 생명운동가였다. 어떤 수식어로 살든 시대의 아픔을 함께 했고, 인류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 보폭을 빨리했다. 직업을 갖지 않았기에 삶은 궁핍했으되 여유가 넘쳤고, 소외되고 핍박받는 민초들의 손은 외면하지 않았다. 원주 봉산동 그의 토담집에는 군 장성에서부터 국밥 파는 아주머니까지, 사람들로 넘쳐났다고 한다. 우주와 인간을 관통하는 무위당 선생의 실천적 언어를 듣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그때마다 선생은 찾은 이의 근기(根機)에 맞는 가르침을 전하며 시대의 스승을 마다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지위고하, 빈부격차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방문객 차별없이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위안과 길잡이가 될 만한 말씀을 주셨다고 전한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사표(師表)를 자처했던 무위당에게 세상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시인 김지하는 그를 스승이라 했고,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은 단 한번 보고 홀딱 반했다 했다. 목사 이현주는 부모 없는 집안의 맏형 같은 사람이라 했고,『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유홍준이 어디를 가던 함께 가고 싶다 하고, 소설가 김성동과 「아침이슬」의 김민기가 아버지로 여겼다. 판화가 이철수는 진정한 뜻에서 이 시대의 단 한 분의 선생님이라 칭했다.

“시대의 명망가들이 입을 모아 그를 칭찬한 것만 봐도 선생의 위대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떠나고 우리는 남았다. 선생의 ‘모심과 섬김’의 삶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남은 이들은 선생의 정신을 오늘에 재발견하고 후세에 전하려 한다. 그 중심에 사단법인 ‘무위당사람들’이 있다. ‘무위당사람들’은 선생의 삶과 사상, 작품을 정리하고, 뜻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함께 나누는 소박한 법인으로 지난 2010년 설립됐다. 선생의 삶과 뜻을 세우고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작품을 정리해 이웃과 함께 나누는 일을 통해 무위당 선생을 찾는 벗들에게 소박하나마 선생의 삶과 뜻을 알리는 교육 문화기능을 하고 있다.

특히 무위당 선생이 평생 추구한 생명운동과 협동운동, 지역 공동체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공동체적 삶을 구현하고,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현재 2천5백명의 회원들이 참여하는 전국 조직으로 발전했다. 전국의 한살림 조직과 협동사회 단체와 견고한 네트워크 체제를 구축, 협동운동과 생명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고 있다. “무위당사람들의 대구지역 거점인 대구무위당학교는 무위당 선생의 삶과 사상을 기리고 세상에 알리기 위해 설립됐다.”

◇ 무위당의 가치 실천으로 진정한 행복 이루고파…

신 대표는 91년 교육대학 총학생회장을 지내며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사회운동 현장에서 생활하면서 세상은 그렇게 거대담론으로 변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이후 대안학교와 공동체 운동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무위당의 정신에 매료된 것은 2000년대였지만 90년대초에 봉화 청량산 자락에서 농민으로 살았던 정호경 신부를 통해 무위당을 처음 만났다. 그의 정신을 대구에도 알리겠다는 열망으로 지난해 대구가톨릭대 대학원생을 중심으로 대구무위당학교를 공부하고 설립했다.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았다. 그러다가 무위당 선생을 진짜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됐다.”

대구무위당학교는 헤쳐모여를 원칙으로 한다. 정규 조직을 만들지 않고 일이 있을 때마다 모였다 해산하는 클라우드 방식의 운영을 지향한다. 사업이 끝나면 통장은 제로로 만든다. 조직이 힘을 갖기보다 무위당의 뜻이 빛을 발하는 것에 목표를 둔 선택이었다. “대구무위당학교는 다른 시선, 다른 생각을 통해 우리의 삶을 성찰하고, 공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특히 무위당 선생의 정신을 따르기 위해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잘 살피는데 집중한다.”

무위당의 위대함은 지행합일에 있다. 외침은 누구나 할 수 있어도 실천은 또 다른 문제다. 공자나 붓다처럼 지행합일을 완성한 인물이어야 비로소 성인으로 추앙받는데, 그 삶이 쉽지 않음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무위당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배경에 지행합일이 있다. 그는 평생 시대를 통찰하고 더 좋은 세상을 위한 실천에 앞장서 왔다. 문득 신 대표가 “정의와 민주를 외치는 나는 진정 행복한지? 나의 삶은 정의로운지, 집에서도 민주적인지, 남을 설득할 수 있는 주장인지에 대해 자문하면 의문이 든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구무위당학교는 진정한 행복을 위해 비슷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자 한다”고 했다.

신 대표가 막힘없는 삶을 언급했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연스럽게 일을 도모하면 막힌 물도 흐르게 된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는 조직 대신 좋은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헤쳐모이며 무위당의 가치를 실천해 왔다. 쪽방촌 탄소섬유장판 교체, 나 마을도서관 간판제작, 연탄 배달 및 마을학교 이사 프로젝트 등은 대표적인 활동들이다.

신 대표는 어린이나 청소년 무위당학교 운영에 대한 의지도 피력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회의 공생 등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무위당 선생의 가치를 미래세대인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것. “무위당 선생이 80년대에 생명의 관점에서 세상의 변화를 모색했다. 그 가치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대구무위당학교는 그 정신을 대구에서 펼쳐갈 것이다.”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