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들려주고픈 기묘한 우화
딸에게 들려주고픈 기묘한 우화
  • 황인옥
  • 승인 2019.03.25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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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라 바스케즈 델라 호라 우손갤러리서 亞 첫 개인전
칠레 출신 디아스포라인 작가
고대 신화·토속신앙 이야기
주술적 상징·원초적 의미 입혀
불분명한 국적 혼란 빠진 딸에
다름·차이에 대한 존중의 의미
다양한 테마 그림으로 타일러
El Portador de las Estrellas
산드라 바스케즈 델 라 호라 작. 우손갤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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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라 바스케즈 델 라 호라 작.

 

산드라 바스케즈 델라 호라 우손갤러리서 亞 첫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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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산드라

벌거벗은 남자가 보따리를 둘러메고 줄행랑을 치기 직전인데 개 한 마리가 남자의 다리를 물고 놓아주질 않는다. 보따리 속에는 벌거벗은 어린아이 세 명이 엉켜있는데, 흡사 어린아이 유괴 장면 같다. 알몸을 한 여인의 시스루 망토 속에도 남자 아이가 꼼짝달싹 못하고 옥죄어 있다. 새의 부리를 한 여인의 입에는 꽃 한 송이가 물려있고, 머리 위에는 해골 형상도 비친다. 잔혹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그림들에서 원시적이고 괴기스러운 분위기가 짙게 풍긴다. 작가 산드라 바스케즈 델라 호라가 “고대 신화나 토템 신앙 속 이야기를 원초적으로 풀어냈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그제야 ‘주술적이면서도 잔혹 동화 같은 이 그림’의 의문이 풀렸다.

산드라 바스케즈 델라 호라가 우손갤러리에서 21일부터 ‘Take Back My Shadow’전을 시작했다. 아시아 첫 개인전이자 이례적인 작가의 대규모 전시다. 유럽과 미국, 라틴 아메리카 등 세계 곳곳의 수많은 전시와 각국의 주요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으며 아트바젤과 프리즈 등의 국제 아트페어에서도 빠지지 않고 작품을 출품하며 유명세를 누리는 작가가 이번 전시에는 자식같이 아끼는 최애(最愛)품들만 골라 내놨다. 작품 제작 시기도 다양하고, 처음 소개되는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세상과 소통하기보다 ‘엄마가 딸에게 들려주는 인생 지침서’ 같은 작품들인 것.

“딸이 어릴 때 칠레에서 독일로 이사 와 정체성의 혼란이 생겼어요. 딸에게 인생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 줄 필요성을 느꼈죠. 그러나 독일어에 더 익숙한 딸에게 어떤 언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머뭇거렸고, 그때 화가인 제가 딸과 소통하기에 그림이 제격이겠다 싶었죠.”

작품만 보고 작가의 모국을 유추하기가 쉽지 않다. 서양과 동양 어느 쪽이라고 해도 반론 을 제기할 근거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작품에서 두 문화권의 경계가 흐릿하다. 다양한 문화권에 대입해도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이는 작가가 추구하는 철학과 관계된다. 그녀가 “각자 가진 개별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존중, 즉 ‘다름에 대한 존중’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한다. 그 주제를 다양한 테마나 의미로 드러내고 있다”고 언급했다.

산드라는 칠레 디아스포라다. 향토색 짙은 칠레 출신이지만 독일에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디아스포라라는 개인사가 ‘다름에 대한 존중’과 무관치 않을 것. 그러나 생각해보면 다양한 문화에 대한 존중은 비단 디아스포라만의 가치일까 싶다. 국가와 문화의 경계가 느슨해진 현대인에게도 ‘타자에 대한 존중’은 성공을 향한 필수 덕목이기 때문. 작가가 그런 삶을 살아왔고, 역시 칠레 디아스포라로 살아갈 딸에게도 같은 삶의 지침서를 제시하는 배경에 이같은 다의적인 의도들이 개입했을 것이다. 그런 철학이 토속신앙과 주술 등의 남미 특유의 토속성과 삶과 죽음의 순간을 고대 그리스의 비극처럼 광적이고 드라마틱하게 시각화한 작가의 드로잉에도 오롯이 배어 있다.

“전 세계 신화와 전설, 민속에 대해 광범위하게 공부해요. 신화적인 부분이나 토속적인 종교 그리고 원주민에 관해 쓴 철학자들의 책도 찾아보고요. 많은 인류학적인 부분에서 영향을 받으면서 제 방식으로 소화해 내죠.”

작업 초기부터 지금까지 흑연 드로잉을 고집해왔다. 작가는 각양각색의 종이에 흑연 드로잉을 선보여왔다. “가식 없는 솔직함, 직설적인 느낌이 좋아서 드로잉에 천착했다”고 한다. 97년부터 왁스를 녹여 만든 액체에 드로잉한 작품을 담그는 과정을 추가했다. 왁스 액체에 담그는 과정은 고대 그리스의 성서나 철학 논문 등의 기록을 보존하는 방법과 동일하다. 다양한 재질의 종이를 사용함으로써 자칫 빠질 수 있는 부산스러움을 왁스 액체 마감으로 통일감으로 치환하고, 새로운 생기도 불어넣을 수 있었다. “왁스 액체에 담그면서 투명한 피부와 같은 독특한 물성과 모호한 시간의 깊이가 생겼어요.”

고대 신화나 칠레의 토템 신앙 등의 원초적인 이야기로만 끝났다면 국가를 초월한 인기 작가의 반열에 들지 못했을 수도 있다. 작가는 정치, 종교, 성(性), 사회적 현실, 민속과 문화, 질병, 죽음 등 인류사의 근본적이고 해결되지 못하는 난감한 문제들을 주술적이고 신화적인 원초성으로 풀어내며 현재성을 확보한다. 원시성과 동시대성이 조우하는 바로 그 지점에 추종자들의 환호가 자리한다. “동시대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간의 비극을 보편적인 신화와 전설, 우화 등을 통해 희극적으로 묘사해요. 우리 안에 잊혀진 무의식의 경험을 통해 인간적 공감대를 형성하죠.” 전시는 6월 8일까지. 053-427-7736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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