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 사용 적당히 했으면
외국어 사용 적당히 했으면
  • 승인 2019.04.02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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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봉조 수필가
“할머니, ‘레그프레스’가 뭐야?”

“뭐? 레그프레스?”

“그러면 ‘롤링웨이스트’는 뭐야?”

“글쎄, 잘 모르겠는데….”

아파트 주변 공원의 체육시설 안내판 앞에서 더듬더듬 글자를 읽는 어린 손자와 할머니가 나누던 대화 중 일부다.

주말의 한낮, 가벼운 복장으로 공원산책에 나섰다. ‘미세먼지 나쁨’이라던 일기예보와는 달리 하늘은 높고 맑았다. 포근한 날씨에 가족 단위 상춘객도 많았다. 어린아이와 할아버지가 재미있는 공놀이에 땀을 흘리고, 청춘남녀가 배드민턴을 치거나 굵직한 훌라후프를 돌리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매우 즐겁고 행복하게 보였다.

수명이 점점 늘어나면서, 야외운동이 다양해지고 활성화된 것 같다. 어디를 가나 쉴 수 있는 벤치와 여러 종류의 운동기구가 나란히 설치되어 있는 현장을 만나고는 한다. 아파트 주변이나 뭇사람들이 오가는 근린공원, 산 중턱에서도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지역주민 건강을 위해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이는 것은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부터, 눈으로만 보고 지나치던 운동기구를 직접 이용하기 시작했다. 기구마다 운동의 이름과 사용방법, 효과, 주의사항 등을 간단히 표시해놓은 곳이 있는가하면 체육시설이 설치된 입구에 일목요연하게 기구의 모양과 명칭을 게시해놓은 경우도 있다.

앞의 대화가 이어졌던 공원에는 레그프레스. 롤링웨이스트, 스트레칭로라, 스텝사이클, 크로스컨트리, 트윈워밍암, 체어플 등의 기구가 사진과 함께 안내가 되어있다.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에 국민체육진흥공단의 지원을 받아 운동기구를 설치했다는 친절한 설명도 있다. 그런데 빨리 달려가서 이용을 하고 싶다는 충동보다 어려운 이름에 머리가 무거워지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내가 즐겨 이용하는 것은 동작이 쉬운 허리 돌리기와 옆 파도타기, 공중 걷기 등이다. 설명대로만 따라하면 적당히 몸을 풀거나 부분적인 근력운동을 할 수 있다. 아니, 기구의 모양이나 이름만으로도 운동방법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허리 돌리기는 손잡이를 잡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접시 같은 발판에 발을 고정한 채 상체를 좌우로 움직이며 허리를 돌리는 것이다. 옆 파도타기는 손잡이를 잡고 발판에 발을 올린 후 옆으로 파도를 타듯 하체를 움직이다보면 가볍게 하늘을 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주말이나 공휴일은 예외로 치자. 체육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햇볕이 따뜻한 낮 시간에 산책을 즐기는, 허리와 어깨가 약간 구부정하거나 은퇴 이후의 삶을 건강하고 활기차게 보내려는 세대 또는 그들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는 어린아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뜻을 알기 쉬운 우리말로 안내를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다만 전문적으로 운동을 하는 헬스장이나 체육관이라면 다를 수도 있겠다. 그렇다 해도 정확한 외국어 명칭은 반드시 기재해주는 것이 옳다. 적당한 우리말이 없어 오래도록 우리말처럼 사용되어 온 외래어라면 몰라도, 외국어를 단순히 소리 나는 대로 옮겨 적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비단 운동기구 명칭만을 꼬집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분야를 막론하고, 우리 사회에 만연한 외국어 사용이 도를 지나친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언제부터인지 얼른 받아들이기 어려운 ‘워라벨’이라는 말이 뉴스에 등장하는가 싶더니, 국회에서 주로 사용되는 ‘패스트트랙’이라는 용어가 아무런 부연설명 없이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뉴스에 그대로 전해졌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 때문인지, 직접 검색을 해보거나 눈치껏 알아채라는 뜻인지 모르겠다.

‘플라스틱 프리 챌린지’가 소리를 내더니, 최근에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한 ‘독립선언서 필사 챌린지’가 지식인들 사이에서 전개되고 있다. 플라스틱 프리 챌린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개인 컵 사용하기’가 훨씬 뜻이 분명하고 동참하기 쉽다. 그리고 주체의식이 바탕인 독립선언서를 따라 쓰는 일에, 어찌하여 ‘챌린지’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것인지….

활짝 핀 벚꽃과 개나리가 길손들의 탄성을 자아내고, 게으름 부리던 근육들도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몸을 단련하기 위해 운동을 하는데, 어려운 운동기구 이름 앞에서 머리가 무거워지는 일은 더 이상 없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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