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여행의 멋과 맛
걷기 여행의 멋과 맛
  • 승인 2019.04.16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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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봉조 수필가
제주도로 걷기 여행을 다녀왔다. 며칠이라도 제주의 바람을 쐬고 오면 묵었던 피로가 거짓말처럼 가벼워지는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첫 일정은 제주의 서부 애월(涯月)쪽이었다. 수령 천년이 훨씬 넘었다는 제주시의 보호수 팽나무와 4백년은 더 된 것으로 보인다는 토종 진귤나무를 찾아갔다. 그리고 몇 번의 갈림길을 지나 아름다운 애월항으로 걸었다. 노랗게 펼쳐진 유채꽃밭을 지나 갈매기들의 쉼터인 바윗돌을 건너며 세찬 바람에 넘어지지 않으려 몸을 옴츠리기도 했다. 멀리서 돌고래 가족이 연이어 뛰어오르는 광경을 기대했지만, 돌고래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둘째 날 오전은 동문로터리 주변의 자연형 하천 ‘산지천’에서 평화로이 유영하는 물고기들의 모습에 놀라고, 깔끔하게 정비된 꽃길과 우람한 나무 그늘 아래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만끽했다. 그리고 조천읍 선흘리의 곶자왈 ‘동백동산습지’로 향했다. 환경부로부터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며, 람사르습지로도 등록이 된 그곳에는 아름드리나무가 터널을 이루어 숲속을 걸을 때는 자외선을 가릴 필요가 없을 만큼 서늘한 공기가 좋았다. 하지만 햇볕이 드는 곳에서만 붉은 동백꽃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다음 코스는 동백동산습지에서 순환버스를 이용해 천연기념물 제374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는 구좌읍 평대리의 ‘비자림’으로 갔다. 양탄자 위를 걷는 듯 가벼운 걸음으로 울창한 비자나무 숲길을 걸으며 달고 알싸한 향에 취하고, 피톤치드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낀 시간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나도풍란, 풍란, 콩짜개란, 흑난초, 비자란 등 난과식물의 자생지이기도 하다니 그들의 희귀한 모습을 찾아보려했지만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마지막 날은 숙소가 있던 함덕해수욕장에서 제주올레 18코스의 중간지점인 삼양검은모래해변까지 약15㎞ 정도의 거리를 쉬엄쉬엄 걸었다. 이틀 동안 주로 나무와 숲을 찾아다니며 삼림욕을 즐겼으니 남은 하루는 해변을 걸으며 새로움을 만나보기로 했던 것이다.

같은 길을 여러 차례 걸어보았지만 반대 방향으로 걷기는 처음이었다. 조천리와 신천리 일대를 걷는 재미가 어느 때보다 쏠쏠했다. 순한 바닷바람과 포근한 봄볕, 검고 울퉁불퉁한 바위 위에 누군가 소원을 담아 쌓아올렸을 크고 굵직한 돌탑들과 갖가지 야생화와 이국적인 모습의 키 큰 야자수들.

특히 물질을 하러 나간 여인들이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위에 가지런히 벗어놓은 플라스틱 슬리퍼를 바라보며 많은 느낌을 가졌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저 슬리퍼가 어쩌면 그들의 생사를 확인하는 증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추측에 마음이 짠했다. 누구라도 제 시간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슬리퍼는 어떤 심정으로 주인을 기다릴까.

해변을 벗어나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면 또 다른 풍경이 길손을 유혹한다. 어느 집 앞에서 오밀조밀 다져진 화단을 기웃거리고 있을 때, 뒷짐을 진 할머니가 기다렸던 손님을 맞이하듯 들어와서 구경하라고 안내를 해주셨다. 일행 중 한 명이 ‘여기가 예술가들이 사는 동네’ 맞느냐고 물었을 때, “그래, 내가 예술가야”라는 답이 서슴없이 돌아왔다. 무슨 작업을 하시는지 물으니 “이렇게 정원을 가꾸고 있지”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셨다.

정원에는 애정이 담뿍 밴 꽃과 잘 다듬어진 나무에 곱게 쌓아올린 돌과 파, 마늘, 유채 등 채소도 구색을 갖추어 자라고 있었다. 마음이 느긋하고 여유로운 분이셨다. 스스로 우러난 자부심이 아니었다면 쉽게 나오지 못할 농담과 인자한 표정. “바쁘지 않으면 차라도 한 잔하고 가라”고 하셨지만 말씀만으로도 감사하다며 우리는 걷던 길을 계속 걸었다.

배낭을 메고 한가로이 걷다보면 자동차 여행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색다른 멋과 맛을 즐길 수 있다. 좁다란 골목길 나지막한 담장과 아담한 정원에서도 예술가를 만날 수 있고, 마을 사람들과 나눈 소박한 대화 몇 마디에 꾸밈없이 웃을 수 있는 행복도 걷기가 아니면 만나기 어려운 일이다.

매일 2만 보 이상의 걸음을 옮겼지만 누구도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얽매이지 않은 여유로운 멋에 달콤 쌉싸름한 맛까지 더해지니, 언제나 다음이 기다려질 수밖에. 걷기 좋은 계절이다. 건강과 환경을 함께 살리는 일에, 자동차의 굴레를 벗어나 걷기에 나서보는 것은 어떠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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