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항일 영웅’ 김원봉...월북에 가려진 그의 삶과 업적
비운의 ‘항일 영웅’ 김원봉...월북에 가려진 그의 삶과 업적
  • 김광재
  • 승인 2019.04.18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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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태어난 김원봉
1919년 동지들 뜻 모아
의열단 세우고 단장 맡아
1926년까지 23차례 거사
베이징서 신채호 만나
조선혁명선언서 작성
의열단 가입자 크게 늘어
밀양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에 그려진 약산 김원봉 선생과 그의 부인 박차정 의사의 벽화.

 

의열단 창립 100주년…밀양 의열기념관을 가다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

2015년 개봉해 1천2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암살’에 특별출연한 조승우의 이 대사 한 마디가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다음 해 개봉한 ‘밀정’에서 이병헌이 맡은 정채산이란 인물도 김원봉을 모델로 했다고 알려져 다시 주목을 받았다. 올해 의열단 창립 100주년을 맞아 다시 김원봉에 대한 서훈 여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경남 밀양시 김원봉의 생가터에는 지난해 개관한 의열기념관이 있다. 2층 건물을 8개 주제로 나눠, 밀양 출신 인물들이 주축이 된 일제 강점기 의열투쟁을 개관할 수 있도록 전시 구성을 했다.

밀양은 의열투쟁으로 독립운동 서훈을 받은 사람만 12명으로, 의열정신의 본향이라 할 수 있다. 밀양 지역에서는 대종교, 불교, 기독교 등 각 종교가 항일구국운동에 하나로 뭉쳤고, 1890년대부터 근대교육기관이 속속 세워져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할 인재들을 길러냈다. 이를 바탕으로 비밀결사운동, 3.13 밀양장날 만세시위 등 총 8차례의 만세시위운동, 의열투쟁, 대중운동 등이 펼쳐졌다.

김원봉은 1898년 밀양군 노하골(현 밀양시 내이동) 901번지에서 태어났다. 8세에 서당에서 ‘통감’을 읽었고 11세에 밀양공립보통학교에 편입했다. 이웃에 살던 두 살 아래 윤세주와는 특히 친했는데, 두 소년은 1911년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일장기를 학교 화장실에 처넣어버렸다.

1919년 만주 길림으로 간 김원봉은 조선독립군정사 간부인 고모부 황상규의 지도에 따라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동지들을 규합하고 폭탄제조법 등을 배웠다. 그해 11월 9일 김원봉은 길림의 중국인 반씨 집에서 동지들과 함께 정의를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설 것을 맹세, 이튿날 의열단을 정식으로 창립하고 단장이 됐다. 창립단원은 김원봉 윤제주 이성우 곽재기 강세우 이종함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 등 13인이다.

이들은 △천하의 정의의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한다 △하나가 아홉을 위하여 아홉이 하나를 위하여 헌신한다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단한다 등 공약 10조를 채택했다. 암살대상으로는 조선 총독 이하 고관·군부 수뇌·대만 총독·매국노·친일파 거두·적 염탐꾼·반민족적 토호열신을, 파괴대상으로는 조선 총독부·동양척식회사·매일신보사·각 경찰서·기타 주요기관을 지목했다.

의열단은 1926년까지 상해·북경·천진 등지에 거점을 두고 세 차례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를 비롯해 23차례의 크고 작은 대일 거사를 기획하고 실행했다. 기념관 2층에는 최수봉 의사의 밀양경찰서 투탄 의거 애니메이션 영상과 나석주 의사의 식산은행·동양척식회사 투탄 의거 조형물 등이 전시돼 있다.

미국의 여성 저널리스트 님 웨일스가 의열단원 김산(장지락)의 일대기를 다룬 ‘아리랑’에는 의열단원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의열단유품
의열기념관에 전시된 의열단의 격문, 신임장과 당시의 권총.


“의열단원들은 마치 특별한 신도처럼 생활하였고, 수영, 테니스 그 밖의 운동을 통해 항상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매일같이 저격연습도 하였다. 이 젊은이들은 독서도 하였고, 쾌활함을 유지하기 위해 오락도 하였다. 그들의 생활은 명랑함과 심각함이 기묘하게 혼합됐다. 언제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생명이 지속되는 한 마음껏 생활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기막히게 멋진 친구들이었다. 스포티한 멋진 양복을 입었고, 머리를 잘 손질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도 결벽할 정도로 말쑥하게 차려입었다.”

김원봉은 의열단 투쟁노선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1922년 베이징으로 신채호를 방문해 이념과 투쟁목표를 성문화해 줄 것을 요청했다. 신채호는 의열단 선언이라고도 불리는 ‘조선혁명선언’을 통해 민중에 의한 직접 혁명으로 끊임없는 폭력 투쟁을 전개해야만 일제에게서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지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1923년 1월 조선혁명선언이 발표된 이후 의열단원들은 스스로를 혁명가로 인식하게 됐으며, 의열단 가입자도 크게 늘어 150명에 이르게 됐다.

김원봉은 1926년 의열단의 노선을 군사·정치운동을 전환시키면서 단원들과 함께 중국 국민당 정부가 설립한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가 수학했다. 이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해 150명의 항일투사 겸 민족간부를 양성했으며, 1935년에는 9개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체인 ‘민족혁명당’을 창립하고 의열단은 자진해체했다.


 
의열기념관
의열기념관 옥상 공원.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총대장이 됐다. 국민당 정부가 대일항전에 소극적인 노선을 취하자, 조선의용대 내 공산 계열을 비롯한 상당수가 팔로군 지역인 화북으로 넘어가 무정이 조직한 ‘조선의용군’이 된다. 1941년 민족혁명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가를 결의했고, 중경에 남은 조선의용대도 광복군 제1지대로의 편입했다.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 겸 제1지대장이 됐다. 이후 임시의정원 의원을 거쳐 1944년에는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으로 선임됐다. 그러나 임정 내에서 군무는 광복군 총사령 중심으로 움직였고 김원봉의 역할은 크지 않았다. 김원봉은 임정의 우파로부터는 공산주의자로 지목됐으나 중국공산당으로부터는 소부르주아적인 악덕을 지닌 민족주의자로 배척받았다.

광복 후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하던 김원봉은 남북협상이 좌절되자 북에 남았다. 그의 월북 이유에 대해 친일 경찰에게 모욕을 당하고 백색테러의 위협이 심해졌기 때문이라는 관련자들의 증언이 있었고, 미군정의 탄압이 심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김원봉은 북한에서 국가검열상,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으나 전문가들은 실권이 있는 직책은 아니었다고 한다.

특히 그는 조선노동당 당원도 아니었으며, 군소 정당인 ‘조선인민공화당’의 중앙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52년 노력훈장을 받았으나 군사적인 공로가 아니라 봄 파종 사업을 지도한 공로로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 1958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되고 11월 중국 국민당 장개석의 사주를 받은 국제간첩이라는 혐의로 숙청됐다.

김원봉에 대한 서훈 여부를 두고 논란이 심해지자 국가보훈처는 “현행 심사기준으로는 포상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밝혔다. 해방 후의 사회주의 경력자들까지는 가능하지만 북한 정권 수립에 관여한 사람까지 훈장을 주려면 국민적 공감대가 더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밀양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
해천은 밀양성의 해자를 복원한 것인데 밀양시는 그곳에 항일운동테마거리를 조성했다.


우리 민족의 항일 무장투쟁을 이끈 조직은 크게 임정의 광복군, 만주의 항일빨치산, 조선의용군으로 볼 수 있다. 냉전체제 아래서 앞의 둘은 어떤 형태로든 각각 남북에 자리를 잡았으나, 김원봉의 조선의용군은 양쪽으로부터 배척당한 셈이다. 역사나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에는 보는 사람의 욕망이 드러난다. 지금의 논란은 김원봉이라는 거울에 비친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여주는 셈이다.

김광재기자 contek@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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