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아트피아, 작고작가 기획전 '심정필정 소헌 김만호전'
수성아트피아, 작고작가 기획전 '심정필정 소헌 김만호전'
  • 황인옥
  • 승인 2019.04.28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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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 27년... 서예계 거목 故김만호 예술세계 첫 조명
미공개작 등 유작·유품 100여점 전시
단아하되 웅장하고 화려한 필체 구사
학문·한의·서도에 매진한 삶 한눈에
서실에서작품하시는모습
1987(80세) 서실에서 작품하시는 모습. 소헌미술관 제공
 

 

붓글씨의 기세가 하늘을 찌른다. 기백과 힘이 넘친다. 뿐만 아니다. 어머니의 미소같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백미다. 소헌(素軒) 김만호(1908~1992) 선생이 붓글씨로 쓴 중국 동진 시대의 시인인 '도연명의 사시(四時·1978)'에서 음과 양, 동(動)과 정(情)의 균형이 팽팽하다. 분명 글씨인데 우뚝 솟은 산세와 굽이치는 강물이 풍경화처럼 어른거린다. 소헌의 문인화 작품 '맹호출림(猛虎出林·1974)'의 분위기는 붓글씨와 사뭇 다르다. 성근 대밭을 노니는 호랑이의 얼굴에서 파안대소(破顔大笑)가 터져나온다. 호랑이 얼굴에서 정감과 익살이 넘쳐난다. 원숙한 경지로 일가를 이뤘던 67세와 71세에 쓰고 그린 두 작품에서 걸림없는 충만한 자유가 넘실댄다.

원곡(原谷) 김기승 선생은 소헌 선생의 서(書)에 대해 “단아하면서도 웅려(雄麗·웅장하고 화려하다)하여 속진(俗塵·세상의 여러 가지 번잡한 일)을 벗어났다. 일가(一家)를 형성한 영남의 대표적인 서예가”라고 했고, 모산(慕山) 심재완 박사는 “원숙자재(圓熟自在)의 경지에 들어섰다”고 평했다. 또 이태수 시인은 '대구예술(1992.2)'지에 기고한 '타계한 원로 서예가 소헌 김만호'서 “김만호 선생은 서예(書藝)보다 '서도(書道)'를 지향했다”며 진심어린 찬사를 보냈다.

수성아트피아가 작고작가 기획전으로 '심정필정(心正筆正) 소헌 김만호전'을 전관에서 열고 있다. 유작 50여점과 유품 50여점을 공개한다. 그동안 소개되지 않았던 대형작품과 소헌체, 행초서, 해서, 문인화 등 다양한 작품과 그의 손때가 묻은 유품의 아카이브 전시도 함께한다.

◇서예(書藝) 아닌 서도(書道) 추구

소헌을 언급하는 핵심 단어는 '심정필정(心正筆正)'이다. '마음이 발라야 글씨가 바르다'는 의미다. 선생은 서예를 단순히 예술의 경지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는 붓글씨를 서예보다 높은 단계인 도(道)의 경지로 인식했다. 바로 서도(書道)였다. 그에게 좋은 글씨란 '바른 마음이 글씨로 드러난 상태'를 의미했다. 서법연마와 정신수행을 병행해야 이를 수 있는 경지다. 마음을 먼저 닦아야 서도에 이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구도자는 깨달음을 위해 지극한 수행을 마다하지 않는다. 깨달음에 이를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고행도 기꺼이 감수한다. 소헌은 서도(書道)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어떤 수행을 감행했을까? 그는 평생 학문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학문을 통해 자신과 세상, 존재의 본질에 대해 탐구해갔다. 사실 이런 태도는 어린시절 발현됐던 그의 천재성으로부터 기인한다. 소헌은 유아기 때 이미 일용천자문 등의 서책을 가지고 놀았고, 10세때 이미 통감(通鑑)과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를 마쳤다. 14세 때 시경(詩經)과 서경(書經) 그리고 주역(周易)까지 섭렵했다. 뿐만 아니라 16세에는 대적할 만한 문필가를 찾아 스스로 유랑길에 나설 만큼 학문에 뜻을 두었다.

학문과 서도는 소헌에게 둘이 아닌 하나였다. 소헌은 학문과 서도를 동시에 추구했다. 이는 그를 서예가가 아닌 서학인(書學人)으로 지칭하는 배경이다. 소헌의 서도적 천재성도 학문 못지않게 일찍 두각을 드러났다. 9세 때 이미 인근에서 붓글씨 신동(神童)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당시 경성의 법필사(法筆師)였던 창랑 김희덕 선생을 만나 유공권(柳公權)과 구양순(歐陽詢)의 본첩을 섭렵하고 상고(上古)와 왕희지의 법첩을 익혔다. 17세에는 마공, 가천, 청하 등 유명한 서숙(書塾·사사로이 한문을 가르치는 곳)을 순회하면서 한문과 서도를 더욱 깊이 있게 추구했다.

◇ 한의학으로 인본주의 실천

소헌은 서가(書家) 이전에 한의사였다. 당시 선생은 한의사로 명망을 쌓았다. 일제 강점기 이전은 조선 백성 누구나 곤궁과 핍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지만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한의사로 살면서 선생은 평균 이상의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선생에게도 그 법칙은 오롯이 적용됐다. 경제적인 안정과 인본주의적인 삶은 확보할수 있었지만 서도에만 정진하는 환경은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순응할 소헌이 아니었다. 한의원 건물에 서실을 마련하고 무료로 제자들을 길러내는 한편 서도와 깨달음을 향한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소헌의 생이 학문과 의술과 서도로만 점철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는 평생 한눈 한번 팔지 않고 그 세 분야만 파고 또 팠다.

소헌의 중년은 깨달음의 시간들로 점철됐다. 오로지 서도의 본질만을 탐구했고, 서도를 통한 인격 수련에 정진했다. 순수정신의 계발이 절정을 이룬 시기였다.

◇ 74세에 한국현대서예 10대 작가로 선정돼
 

도연명-귀거래사
소헌 서체의 대표격 작품 ‘도연명귀거래사(陶淵明歸去來辭)’

소헌은 자신의 성품을 빼닮은 반듯하고 바른 정자체인 해서를 바탕으로 자연미가 배인 중후한 행초서를 주류로 했다. 무엇보다 해서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소헌만의 필법으로 완성한 '소헌서체'는 그의 진면목을 대변한다. 소헌서체는 당의 유공권 해서와 북위 육조체에 동진의 왕희지 행서를 합일하고 한석봉의 국서체를 결합한 후 소헌 특유의 외유내강한 웅혼한 필법으로 완성한 서체다. 전시작 '도연명 귀거래사(歸去來辭 1974)' 병풍은 소헌 서체의 대표격인 작품이다.

작품에 녹여낸 진정성은 세상이 먼저 알아봤다. 1969년에 대구 공화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76년 상주 귀향전, 77년 고희 개인전을 열었다. 또 1978년 서울 견지화랑, 1979년 부산 로타리화랑, 1980년 일본 다가라쓰가(寶塚)초대개인전 등을 열며 국내외에서 명성을 쌓았다. 74세가 되던 해인 1981년에 '한국현대서예 10대 작가'로 선정되고, '한국현대서예 대표작가 집성(12인)'에 작품을 수록하는 영광을 안은 것은 그의 생애 가장 큰 성과다. 대구에서는 그가 유일하게 선정된 것을 감안하면 국내에서의 그의 위치가 짐작된다.

◇ 소헌 재조명 위한 전시 되길

소헌은 한국 서예계의 거목이다. 한학으로 우주만물의 생성원리와 인간 본성을 탐구하고, 한의학으로 인본정신을 실천하는 한편 서도에 이 두 정신과 실천을 녹여내 소헌서도론을 완성했다. 무엇보다 그의 위대성은 심정필정(心正筆正) 정신을 통해 예술인들이 나가야 할 방향과 자세 그리고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을 인간의 근본적 본질 속에서 찾아야 된다는 해답을 제시한 것에 있다.

그러나 진정한 서도를 추구했던 선생이 타계한지 27년이 지났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되지 못했다. 타계 후 외부에서 대규모로 처음 열리는 이번 수성아트피아전은 그를 재평가하는 신호탄이다. 전시는 대규모 작품뿐만 아니라 선생의 손때가 묻는 유품의 아카이브 등으로 광범위하게 구성해 선생의 예술세계와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도록 했다. 또 지난 24일에는 제자 일헌 이완재 선생을 초대해 소헌 선생 생전의 삶과 철학을 들어보는 강좌도 진행했다.

수성아트피아측은 “이번 전시가 독창적인 서품으로 한국 서예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소헌 선생의 예술업적을 더욱더 새롭게 조명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전시는 5월 4일까지. 053-668-1566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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