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 수양·예도 구현에 뜻있는 자들과 봉강서계 발족
인격 수양·예도 구현에 뜻있는 자들과 봉강서계 발족
  • 김영태
  • 승인 2019.05.13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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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강서도회와는 별도의 ‘친목모임’
예도의 참뜻 기록하고자 70인 가입
칠곡 다부동 가산서 취회 기념식수
1970년부터 현재까지 607명 입계
1970년의소헌선생작품
1970년의 소헌 선생 작품 「효백행지원 근위만사본」, 경술년 추석.

 

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17)- 장년시절7. 1970(63세)~1971(64세)

봉강서도회에 대한 선생의 애정은 남달랐다. 회원 개개인의 서도 솜씨에 남다를 애정을 쏟는 것은 물론이고 서도회의 수준을 가늠하는 회원전이 열리면 최선의 회원전을 치를 수 있도록 열정을 쏟았다. 그 즈음 봉강서도회(회장 권오석)의세 번째 회원전이 1970년 5월 6일부터 10일까지 공화회관 화랑에서 개최되었다. 전시에는 회원 27명의 작품 60여점이 출품되었다. 그러나 이번 전시회에서 선생은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 있었다. 1, 2회의 작품전 때 보다 출품 회원 수가 줄었을 뿐 아니라 큰 진전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생 자신의 건강 탓이었다는 자책감으로 안타깝고 한스런 마음이 그지없었다. 그런 한편에 이 전시회에는 소헌 선생에게 소중한 추억이 있다. 주인공은 푸른 눈의 미국인 문하생 헬렌 티젠(Helen Tieszen)이다. 한국명은 지혜련(池蕙蓮)이다. 혜련은 소헌 선생이 사호(賜號)한 아호(雅號)이다. 그녀는 당시 40세의 선교사였으며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3회 봉강서도회전에 해서(楷書) 「월도천심처(月到天心處)」와 사군자 「묵란(墨蘭)」을 출품했던 것이다.

핼렌 티젠 교수는 3년간 봉강서도회에 나와 열심히 서도(書道)수련을 했고 솜씨가 급속도로 늘어나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녀가 처음 서실(書室)을 찾아 왔을 때는 단순히 한국문화를 좋아하고 그 본보기로 서도(書道)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겸손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서도의 멋과 풍류(風流)에 이끌리면서 단순한 관심을 넘어서는 열정으로 발전했다. 이국인(異國人)으로서는 상당히 힘들텐데 빠른 시간에 서도(書道)에 익숙해지고 서도 뿐 아니라 한국의 예절(禮節)과 풍습(風習)에도 익숙해져 갔다.


소헌 선생은 ”가끔 나는 혜련(蕙蓮)의 따뜻한 예절에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한국 여성을 뺨칠 정도로 예의(禮儀)가 발랐기 때문이었다. 명절이 되면 꼭 한복(韓服)을 정갈하게 입고 인사를 하러 왔고 서울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대구에 올 때는 잊지 않고 나의 병상에 들렀다. 뿐 아니라 혜련은 다달이 한글로 빼곡히 쓴 안부편지를 보냈고 우리나라 문화예술에 관한 관심을 함께 적어서 보내왔다. 마치 시집간 딸을 보는 듯 반가움으로 가슴을 훈훈히 적셔 주는 제자였다“라고 회고했다. 1970년 여름에 봉강서계(鳳岡書?)가 발족되면서 지혜련 여사는 서계에 입계하였다.

가을이 가고 이어 겨울을 지나서 이듬해 봄이 왔다. 지난해(1969) 개인전 이후에 두 번째 쓰러졌던 소헌 선생의 건강은 불편했지만 봉강서도회(鳳岡書道會) 회원들은 부지런히 서실(書室)을 드나들었다. 선생 또한 열(熱)과 성(誠)을 아끼지 않았다. 선생의 건강은 눈에 띄게 회복되어 갔고 이전같이 자유롭지는 못했지만 작품을 할 수 있는 건강을 되찾았다.

봉강서계의첫취회
봉강서계의 첫 취회 기념 사진. 칠곡 다부동 가산(1971.4.16)


◆봉강서계 발족(1970)
이 무렵에 선생은 인간적인 유대를 다지는 서계(書?)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봉강서계(鳳岡書?)」의 본격적인 창립준비에 들어갔다. 평소 선생이 중요하게 생각하던 서도(書道)의 길과 병행한 인간적인 유대를 펼칠 장이 비로소 마련되게 되었다. 「봉강서계(鳳岡書?)」는 소우(素愚) 김진용(金瑨鏞), 소원(韶園) 이수락(李壽洛), 청운(靑雲) 김정규(金定奎), 청사(靑蓑) 박선정(朴善楨), 소산(素山) 김기탁(金基卓) 선생의 주도로 봉강서도회(鳳岡書道會)와는 별도로 발기되었다. 병상(病床)의 소헌 선생은 뜻 깊은 일이라 생각했다. 흐뭇한 일이기도 했다. 서도(書道)도 결국은 인간적인 면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사상누각(砂上樓閣, 모래 위의 집)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은 소원(韶園) 이수락(李壽洛) 선생이 적은 ‘봉강서계(鳳岡書?)’의 ‘서문(序文)’이다.

「사람은 뜻이 맞으면 서로 모이게 되고 서로 모이면 그 자취를 남겨야 하는 것이니 옛날 회계(會稽)의 난정(蘭亭)이 역시 뜻 맞는 사람의 모임이요 천고(千古)에 그 향기를 남김이 역시 성스러운 자취의 하나이다. 이제 한국의 웅도인 대구(大邱)에서 소헌(素軒) 김만호(金萬湖) 선생이 지도하는 봉강서숙(鳳岡書塾)을 중심으로 하여 한 모임이 이루어지고 그 모임의 자취를 남기기 위하여 봉강서계(鳳岡書?)라는 계안(?案)이 이루어지니 이 어찌 성사(盛事)가 아니랴.
산음(山陰)의 난정(蘭亭)에서 소장(少長)을 가리지 않음과 같이 이 봉강(鳳岡)의 서계(書?)에도 장소(長少)와 남녀(男女)를 가림이 없이 인격(人格)을 기르고 예도(藝道)를 닦는데 뜻이 맞는 서우(書友)들로서 모아진 것이다. 불설(佛說)에 십리(十里)의 동행(同行)도 전생(前生)의 숙연(宿緣)이 있어야 한다거니 우리들이 이 산만(散漫) 번잡(煩雜)한 진세(塵世)에 처하여 서로 서로 자리를 같이하여 세상의 번뇌(煩惱)를 잊고 예도(藝道)로 지향하는 것이 어찌 숙명(宿命)의 성스러운 연분(緣分)이 아니리오. 난정(蘭亭)의 성사(聖事)가 천고(千古)에 향기를 남겼다면 봉강(鳳岡)의 서계(書?)는 천인(千?)에 날개를 떨침이 되리라. 동성(同聲)에 서로 응하고 동기(同氣)에 서로 구하노니 앞으로 우리의 계(?)가 인원(人員)이 늘고 예도(藝道)가 높아져서 오랜 뒷날에 길이 자취를 남기기를 서로 원하고 서로 힘써야 할 바이다. 경술(庚戌) 첫여름 진성(眞城) 이수락(李壽洛) 적음」

1970년에 발족할 당시 봉강서계(鳳岡書?)의 입계인(入?人)은 김세헌, 김봉조, 이종기, 김진용, 김 도, 김봉섭, 김상택, 이헌, 권혁택, 김석환, 이수락, 권오석, 김정규, 김중원, 김관희, 조용주, 김상일, 박선정, 박준기, 김원섭, 정화식, 김상적, 강종식, 김창환, 김상은, 정영철, 권영규, 정재식, 신점순, 정찬벽, 황주근, 한재용, 지혜련(Helen Tieszen), 김상인, 박정남, 정휘탁, 김학섭, 서찬호, 손정자, 김상대, 최영진, 김영수, 이재웅, 김영식, 김기탁, 류영희, 조정군, 김명순, 장옥분, 박정영, 서계수, 배은경, 황수연, 정우금, 신원일, 이철웅(哲雄), 이지환, 이춘희, 안형준, 김병부, 엄한광, 유종석, 서복향, 이상태, 이종천, 이위형, 오인수, 박옥희, 안인구, 남광호 제씨 등 70인이었다.

1971년 4월 16일(음 3월 23일)에 봉강서계(鳳岡書?) 첫 취회(聚會)가 칠곡 다부동 가산(架山)에서 열렸다. 유사(有司)는 청사(靑蓑) 박선정(朴善楨), 소산(素山) 김기탁(金基卓)이었다.

선생은 이 곳 자신의 매표(埋表) 예정지에 기념식수를 했다.

당시에 백락휘, 이동철, 김기환, 김석조, 이완재, 김재완, 강춘희, 이경영, 박재화, 추근봉, 고영기, 남두기, 이상덕, 김덕기, 박락현, 김태식, 김미형, 김미경, 천성훈,임종섭, 장문환, 류하숙, 류동숙, 신정희, 김상극, 암수무, 도리석, 백선주, 박희동, 전진원, 김재순, 이음자, 박영숙, 김정원, 김헌규, 우경복, 박정자, 김선희, 김애자, 정선영, 황수웅, 김봉인, 박용자, 이종율 제씨가 입계하여 102인의 서계(書?)가 되었다.
첫 취회(聚會) 때 소원(韶園) 이수락(李壽洛) 선생이 시문(詩文)을 지은 아래의 ‘봉강서계서(鳳岡書?序)’가 선포(宣布)되었다.

「鳳岡書?序, 韶園 李壽洛 撰
永和蘭亭之會 右軍王公 以文章名筆 敍其事而書之 至今千餘載 誦其文法其書 實千古勝事也 素軒金萬湖 設 鳳岡書道會 已數十載矣 從而學者 幾至數千而 硏書之際 心通氣合 無異於同氣連肢 乃於辛亥之 三月二十三日 會于架山之陽 效蘭亭之修? 法乎古人風雅也 是日 亦天朗氣晴 萬有具和 山明秀麗 若會?之勝景 英材俊秀 若山陰地群賢 雖無管絃之盛 一觴一書 亦足以暢?幽情 書者畵者 嘯而歌者 詠而唱者 各盡其趣 各?其能 不知春日 將暮而 欣然作超 世之樂 亦一大勝事也 於乎 人生世間 或有時代之異 或有山下之隔 道洞而不得相通 氣合而不得相接者多矣 幸吾? 其生也幷同一時 其住也幷同一? 其所向 同而所求亦同則 豈不爲宿緣之重者哉 然 日月 逝矣 滄桑 ?矣 少者不得不老 老者不得不衰 合者不得不離則 吾人之提携催樂 果能幾時哉 蘭亭之會 列記名蒐記詩序其事 使之不泯其蹟者良有以也 在千古之後 欲效千古群賢轍 知僭越之極 然 其在好古慕賢之義 亦可得有容矣 乃列名而帖之 筆書而輯之 欲爲後日紀念之資 庶不泯 金蘭同好之蹟則幸矣」 (해석 생략)

72년 이후 입계인(지면 관계상 人名 생략)을 포함하여 소헌 선생이 작고한 1992년까지 594인이 입계되어 있으며 작고 이후에 13인이 입계하였다. 2019년 현재 장부(帳簿)에 등록된 입계인(入?人)은 모두 607인이며 120여 분은 이미 작고하였다. 현재의 유사(有司)는 정 명(鄭 ?), 김영태(金榮泰)이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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