밋밋한 도덕이 필요한 순간 '히치하이크'
밋밋한 도덕이 필요한 순간 '히치하이크'
  • 백정우
  • 승인 2019.05.23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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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우의 줌인아웃
백정우의줌인아웃-다시
히치하이크.




영화가 끝을 향할 때, 그러니까 정애가 친구 효정의 친아빠 집에 다시 나타났을 때 소녀가 그러지 않기를 나는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돼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모두에게 가혹할뿐더러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고 보았다.

이야기를 거꾸로 돌리면 이렇다. 열여섯 살 정애는 무허가 판자촌에 산다. 아버지는 간암말기 시한부인생이고 가출한 엄마는 지방에서 일하다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 중이다. 정애 친구 효정은 얼굴도 모르는 친아빠를 찾고 있다. 정애는 현웅의(그는 경찰이고 위기상황에서 정애와 효정을 구해주었다.)집에서 하룻밤 묵는 동안 현웅이 효정의 친아빠라는 사실을 알아챈다. 반면 현웅은 효정에 대한 아무런 기억도 정보도 갖고 있지 않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효정의 엄마는 재혼을 준비한다. 결국 친아빠 찾기를 포기한 효정은 아빠의 젊은 시절 사진과 자료를 정애에게 주면서 “네가 그 집에 가서 내 대신 딸로 살아가”라고 권한다.

지독히도 가난하게 살아온 소녀가 선택의 순간에 서있다. 화재로 집은 전소됐고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친구의 허락도 있었다. 시도해볼만한 모험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대학도 갈 수 있다. 적어도 이전보다는 나을 것이다. 성공의 과실은 달콤할 것인 즉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다. 여기서부터 영화를 움직이는 건 정애의 선택이 아니라 감독의 몫이다. 어느 쪽으로 방향을 트느냐에 달렸다. 누구나 일확천금 노리고 신분상승을 꾀하는 세상. 정애의 가난은 대물림된 것(거창하게 말해 하위계층을 견고히 만드는 사회구조 탓)이니 사춘기 소녀가 한 번쯤 행복한 삶을 꿈꾸고 시도한다한들 책망할 일도 아니다. 하물며 영화 속 이야기임에랴. 종반 현웅의 집에 다시 찾아가 효정의 말을 전하기까지, 아슬아슬한 순간마다 속을 알 수 없는 정애의 표정을 통해 감독은 의구심을 고조시킨다.

“기억나세요? 저번에 저랑 같이 왔던 친구, 걔 이름이 효정이에요. 자기 친아빠 가까이서 한 번 만나보고 싶었대요. 스물여섯 살 생일에 다시 찾아온대요, 저는 그 전에 아저씨가 효정이 찾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이 말 드리려고 다시 찾아온 거예요.”

영화 제목은 ‘히치하이크’이다. 영문으로 The Haunting Hitchhike다. 정애는 두 번의 히치하이크를 한다. 둘 다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고 한 번 더 기회가 찾아왔다. 인생을 갈아탈 절호의 히치하이크였다. 그러나 세 번째 히치하이크에 가담하지 않는다.

살다보면 누구나 선택해야 할 순간과 만난다. 종종 그것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기회가 되기도 한다. 가난하고 추레한 삶에서 나를 건져 올릴 구원의 두레박일 수도 있다. 찰나의 삶과 인생이 달라진다고 해서 악의와 손잡을 순 없는 노릇. 영화를 만드는 동안 감독이 서사와 윤리적 선택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애의 선택은 내러티브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였다. 가슴 졸이는 스릴을 선택할 것인지 밋밋한 도덕을 쥘 것인지를 말이다. 모두가 쉬운 길을 권하는 세상일지언정 영화까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 정애가 거짓을 버리고 참을 선택하게 만든 것은 잘한 일이다. 데뷔작에 대한 의욕을 정애의 마음으로 ‘곱게 갈무리한’ 정희재 감독의 다음 영화를 기다린다.

 

 

 

백정우 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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