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테 향기 너에게 주리라
라테 향기 너에게 주리라
  • 승인 2019.05.27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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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세상의 부모들에겐 많은 짐이 있고 기꺼이 다른 사람들의 짐을 나누어지려는 헌신적인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시련과 짐이 얹히게 마련이다. 그 고단함을 생각하게 하는 시, 나희덕 시인의 ‘못 위의 잠’ 결미 부분을 떠 올리며 대문 바깥에 더 익숙한 그의 삶을 엿보고 싶은 날이다.

덩치 큰 차에 오르면 주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땅보다는 하늘이 더욱 더 가깝게 다가선 듯 구름도 새들도 내 머리 위에 드리워져 맴돈다.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고 볼륨을 높여 일상을 걷어 낸다. 차 안은 경치 좋고 풍경 좋은 오성급 호텔 레스토랑의 귀빈석에 견주어 부족함이 없다. 준비해온 뜨거운 찻물로 두 잔의 커피를 끓인다. 싱그러운 바람을 타고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들을 바라보며 일류바리스타가 뽑아주는 커피에 비해 전혀 손색없는 맛을 음미해 본다.

창문을 열었다. 차 무게만큼 덩치 큰바람이 가슴속 쌓인 먼지를 확 쓸어 담았다가 다시 흩뿌린다. 오월의 아카시아 향기가 켜켜이 들이쳐 건조한 일상을 희석한다. 화물차를 두고 누가 ‘고속도로 위의 무법자’라 하는가? 그들은 가족의 밥줄을 칭칭 온몸에 동여매고 도로 위, 목숨을 저당 잡힌 채 밤낮없이 달려가는 우리의 아버지며 남편이며 아들이다.

경기가 호황인지 불황인지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화물차의 숫자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고문 중, 가장 악랄하고 견디기 힘든 것은 잠을 재우지 않는 것이라 하는데 간간이 지나가는 화물차들의 한산함을 몸으로 부딪치며 고문의 고통보다 더한 생존의 공포를 느꼈으리라. 가족을 위해 끊임없이 쏟아지는 잠의 고문을 숙명이라 여기며 살아가지만 그의 지갑은 ‘유리지갑’이다. 많이 벌어다 주지 못한 죄책감에 당당히 고개조차 들지 못한다.

진로도 퇴로도 없는 가장의 길, 그 고단한 외로움 속에서도 자신의 희생으로 치러진 대가 위에 가족이 편안하게 누릴 수 있음을 가장의 명예며 자존심이라 여긴다. 남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소망해 보지만 생계 문제와 같은 기본적인 삶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채 늘 위기감에 몸서리쳤으리라. 그런데도 단 한 번, 자신의 고통에 관해 얘기하지 않았다.

“힘들었겠네?”

창밖 풍경 속으로 시선을 묻은 채 운전대를 잡은 손등위로 손바닥을 포개놓으며 그에게 물었다.

“그냥 집에 있으라니까 괜히 따라 와서는······.”

그렁그렁, 눈가에 맺힌 이슬을 숨기느라 고개를 숙인 그가 차 안에 드리운 싸한 공기를 걷어내듯 담배 한 개비를 꺼낸 후 불을 붙인다. 그의 시름이 아카시아향기 속으로 취한 듯 빨려 들어간다.

먹먹한 바다에 둥실 뜬 섬 마냥 오월의 신록이 속절없이 푸르다. 주렁주렁 매단 의무와 책임이 버거워 때로는 허덕이기도 하면서 벅찬 계절들을 버티고 지나왔다. 지루하고 권태롭다 여기던 나의 일상이 어쩌면 그의 피나는 희생과 인고의 세월 뒤에 얻어진 보석보다 더 값진 반짝반짝 윤나는 일상이었음을······.

거실 문을 여니 지루하게 널브러져 있던 일상들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다. 가족의 행복만을 바라는 그의 간절함이 보내온 아바타가 시들어가던 나의 일상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목석같은 가구에 기름칠 하고 광을 낸다. 소리 나지 않는 시계는 묵묵히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세탁기속 빨래를 내다 너니 그제야 햇볕에 몸을 맡긴 채 바람을 타고 왈츠를 춘다. 설거지통에서 거품 목욕을 마치고 나온 그릇들이 말갛게 미소 띠며 나를 향해 웃는다.

외롭다 칭얼거리던 책들을 쓰다듬으며 맛있는 청혼을 한다. 남아있는 살아갈 날들에. 지루한 삶 속에 마침표를 찍듯 화해와 반성을 담아 차 한 잔을 끓여내니 찻잔 속에 담긴 남편의 얼굴이 나를 감싸 안는다. 라테 향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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