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어귀, 의류 수거함 위에 알록달록 무지갯빛 고운 자수가 놓인 목화솜 이불 한 채가 무지개처럼 떠올라 있다. 뻣뻣한 기둥서방 닮은 전봇대 옆구리에 쇠사슬을 묶은 채 수거함에 빠짝 몸을 기대고 서 있다. 이끼처럼 군데군데 녹이 슨 자물쇠 사이에는 몇 번이고 붙었다 떨어져 나간 자국이 선명한 청테이프에 간신히 의지한 ‘시각장애인연합회’란 글귀가 가슴 속을 파고든다. 전봇대와 수거함 사이 피어있는 강아지풀도 그리움 한 페이지 차지한 듯 비바람에 너울거린다.
엄마와 아버지는 한겨울, 잠자리에 들 시각이면 늘 다투곤 하셨다. 엄마가 시집올 때 예단으로 해 오신 두툼한 목화 솜이불을 깔고 덮고 자자는 아버지와 너무 무거워 펴고 개기가 버겁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엄마와의 전쟁이었다. 어린 기억 속, 시비를 먼저 건 쪽은 아버지였으나 단 한 번도 이기신 걸 본 적은 없다.
“묵직하게 배를 덮고 자야 잠이 잘 온다니까. 홑이불은 해깝아서 싫어. 죽을 때 갖고 갈끼가? 제발 잠이라도 편하게 좀 자보자”
그런 아버지의 애끓는 당부에도 엄마는 애써 모른 척 하시며
“그럼 당신이 이불 꺼내 깔고 다시 장롱 속으로 개켜 넣을 건가요.”
결국, 그 목화솜 이불은 제대로 한 번 활짝 펼쳐 보질 못했다. 그러기를 여러 해 지난 어느 날, 동네를 돌아다니는 ‘솜 탑니다.’라는 확성기 유혹에 이끌려 세상에 나온 후 이불과 요로 새로 거듭났었다. 그러나 그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의 일이었다.
사람 사이가 넓어지긴 했지만, 한층 얇아진 시대를 살면서 실망도 고통도 그만큼 늘어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외로움의 무게가 느껴질 때면 처방전처럼 복용하는 시가 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 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 /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마종기 시인의 시 ‘우화의 강’ 시작과 끝이다.
연일 지속되는 장마에 습한 날씨처럼 지난 시간들이 그립고 눅눅해진 마음이 뽀송뽀송해 지고 싶은 날이면 ‘우화의 강’처럼 오랜 벗인 그녀를 만나보고 싶다. 먼 곳으로 이사를 한 후, 더 그립고 소중해진 친구다. 요즘 들어 자주 아프다고 한다. ‘아프다는 친구를 위해 그나마 아프지 않은 내가 찾아가면 되지만 나조차 아프면 그 길로 다신 볼 수 없을 텐데.’ 그녀를 만나러 달려갈 때면 나는 줄 곳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의도하고 간 것은 아니었는데 다행히 남편들이 둘 다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는 바람에 계 탄 듯, 운이 좋은 날 그녀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밤늦도록 빗소리 들리는 쪽으로 머리를 두고 나란히 누워 모기장 지나 방문, 대청마루 지나 방충망, 마당 지나 기와지붕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소리 들으며 무대 위, 세 번째 줄 즘 앉은 관객이 되어 서로의 인생을 연기하는 배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듯. 위로를 주고받으며 밤새워 얘기꽃을 피웠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우린 잠들기로 했다. 다음 날 운전해서 먼 길 가려면 조금이라도 자 둬야 한다며 그녀가 이불을 내어준다, 한여름에 때 아닌 솜이불을. 유난히 더위를 많이 타는 나란걸 알았을 텐데…….
그녀는 가슴 위에 묵직한 이불을 덮고 자야 잠이 잘 올 거라며 이불을 덮어준다. 자주 여기저기 아팠던 나 자신을, 우리들의 어머니를, 친구를, 또한 우리를 이해할 단서를 어둠 속, 짧은 꿈속에서나마 찾기를 바라며 나도 그때의 아버지처럼 군말 없이 솜이불을 끌어당긴다. 지긋이 눌러오는 삶의 무게를 느끼며 18살 꿈속으로 들어간다.
엄마와 아버지는 한겨울, 잠자리에 들 시각이면 늘 다투곤 하셨다. 엄마가 시집올 때 예단으로 해 오신 두툼한 목화 솜이불을 깔고 덮고 자자는 아버지와 너무 무거워 펴고 개기가 버겁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엄마와의 전쟁이었다. 어린 기억 속, 시비를 먼저 건 쪽은 아버지였으나 단 한 번도 이기신 걸 본 적은 없다.
“묵직하게 배를 덮고 자야 잠이 잘 온다니까. 홑이불은 해깝아서 싫어. 죽을 때 갖고 갈끼가? 제발 잠이라도 편하게 좀 자보자”
그런 아버지의 애끓는 당부에도 엄마는 애써 모른 척 하시며
“그럼 당신이 이불 꺼내 깔고 다시 장롱 속으로 개켜 넣을 건가요.”
결국, 그 목화솜 이불은 제대로 한 번 활짝 펼쳐 보질 못했다. 그러기를 여러 해 지난 어느 날, 동네를 돌아다니는 ‘솜 탑니다.’라는 확성기 유혹에 이끌려 세상에 나온 후 이불과 요로 새로 거듭났었다. 그러나 그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의 일이었다.
사람 사이가 넓어지긴 했지만, 한층 얇아진 시대를 살면서 실망도 고통도 그만큼 늘어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외로움의 무게가 느껴질 때면 처방전처럼 복용하는 시가 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 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 /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마종기 시인의 시 ‘우화의 강’ 시작과 끝이다.
연일 지속되는 장마에 습한 날씨처럼 지난 시간들이 그립고 눅눅해진 마음이 뽀송뽀송해 지고 싶은 날이면 ‘우화의 강’처럼 오랜 벗인 그녀를 만나보고 싶다. 먼 곳으로 이사를 한 후, 더 그립고 소중해진 친구다. 요즘 들어 자주 아프다고 한다. ‘아프다는 친구를 위해 그나마 아프지 않은 내가 찾아가면 되지만 나조차 아프면 그 길로 다신 볼 수 없을 텐데.’ 그녀를 만나러 달려갈 때면 나는 줄 곳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의도하고 간 것은 아니었는데 다행히 남편들이 둘 다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는 바람에 계 탄 듯, 운이 좋은 날 그녀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밤늦도록 빗소리 들리는 쪽으로 머리를 두고 나란히 누워 모기장 지나 방문, 대청마루 지나 방충망, 마당 지나 기와지붕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소리 들으며 무대 위, 세 번째 줄 즘 앉은 관객이 되어 서로의 인생을 연기하는 배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듯. 위로를 주고받으며 밤새워 얘기꽃을 피웠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우린 잠들기로 했다. 다음 날 운전해서 먼 길 가려면 조금이라도 자 둬야 한다며 그녀가 이불을 내어준다, 한여름에 때 아닌 솜이불을. 유난히 더위를 많이 타는 나란걸 알았을 텐데…….
그녀는 가슴 위에 묵직한 이불을 덮고 자야 잠이 잘 올 거라며 이불을 덮어준다. 자주 여기저기 아팠던 나 자신을, 우리들의 어머니를, 친구를, 또한 우리를 이해할 단서를 어둠 속, 짧은 꿈속에서나마 찾기를 바라며 나도 그때의 아버지처럼 군말 없이 솜이불을 끌어당긴다. 지긋이 눌러오는 삶의 무게를 느끼며 18살 꿈속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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