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 트는 날
솜 트는 날
  • 승인 2019.07.22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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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골목 어귀, 의류 수거함 위에 알록달록 무지갯빛 고운 자수가 놓인 목화솜 이불 한 채가 무지개처럼 떠올라 있다. 뻣뻣한 기둥서방 닮은 전봇대 옆구리에 쇠사슬을 묶은 채 수거함에 빠짝 몸을 기대고 서 있다. 이끼처럼 군데군데 녹이 슨 자물쇠 사이에는 몇 번이고 붙었다 떨어져 나간 자국이 선명한 청테이프에 간신히 의지한 ‘시각장애인연합회’란 글귀가 가슴 속을 파고든다. 전봇대와 수거함 사이 피어있는 강아지풀도 그리움 한 페이지 차지한 듯 비바람에 너울거린다.

엄마와 아버지는 한겨울, 잠자리에 들 시각이면 늘 다투곤 하셨다. 엄마가 시집올 때 예단으로 해 오신 두툼한 목화 솜이불을 깔고 덮고 자자는 아버지와 너무 무거워 펴고 개기가 버겁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엄마와의 전쟁이었다. 어린 기억 속, 시비를 먼저 건 쪽은 아버지였으나 단 한 번도 이기신 걸 본 적은 없다.

“묵직하게 배를 덮고 자야 잠이 잘 온다니까. 홑이불은 해깝아서 싫어. 죽을 때 갖고 갈끼가? 제발 잠이라도 편하게 좀 자보자”

그런 아버지의 애끓는 당부에도 엄마는 애써 모른 척 하시며

“그럼 당신이 이불 꺼내 깔고 다시 장롱 속으로 개켜 넣을 건가요.”

결국, 그 목화솜 이불은 제대로 한 번 활짝 펼쳐 보질 못했다. 그러기를 여러 해 지난 어느 날, 동네를 돌아다니는 ‘솜 탑니다.’라는 확성기 유혹에 이끌려 세상에 나온 후 이불과 요로 새로 거듭났었다. 그러나 그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의 일이었다.

사람 사이가 넓어지긴 했지만, 한층 얇아진 시대를 살면서 실망도 고통도 그만큼 늘어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외로움의 무게가 느껴질 때면 처방전처럼 복용하는 시가 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 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 /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마종기 시인의 시 ‘우화의 강’ 시작과 끝이다.

연일 지속되는 장마에 습한 날씨처럼 지난 시간들이 그립고 눅눅해진 마음이 뽀송뽀송해 지고 싶은 날이면 ‘우화의 강’처럼 오랜 벗인 그녀를 만나보고 싶다. 먼 곳으로 이사를 한 후, 더 그립고 소중해진 친구다. 요즘 들어 자주 아프다고 한다. ‘아프다는 친구를 위해 그나마 아프지 않은 내가 찾아가면 되지만 나조차 아프면 그 길로 다신 볼 수 없을 텐데.’ 그녀를 만나러 달려갈 때면 나는 줄 곳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의도하고 간 것은 아니었는데 다행히 남편들이 둘 다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는 바람에 계 탄 듯, 운이 좋은 날 그녀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밤늦도록 빗소리 들리는 쪽으로 머리를 두고 나란히 누워 모기장 지나 방문, 대청마루 지나 방충망, 마당 지나 기와지붕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소리 들으며 무대 위, 세 번째 줄 즘 앉은 관객이 되어 서로의 인생을 연기하는 배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듯. 위로를 주고받으며 밤새워 얘기꽃을 피웠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우린 잠들기로 했다. 다음 날 운전해서 먼 길 가려면 조금이라도 자 둬야 한다며 그녀가 이불을 내어준다, 한여름에 때 아닌 솜이불을. 유난히 더위를 많이 타는 나란걸 알았을 텐데…….

그녀는 가슴 위에 묵직한 이불을 덮고 자야 잠이 잘 올 거라며 이불을 덮어준다. 자주 여기저기 아팠던 나 자신을, 우리들의 어머니를, 친구를, 또한 우리를 이해할 단서를 어둠 속, 짧은 꿈속에서나마 찾기를 바라며 나도 그때의 아버지처럼 군말 없이 솜이불을 끌어당긴다. 지긋이 눌러오는 삶의 무게를 느끼며 18살 꿈속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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