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고향 상주서 첫 귀향전 마치고 ‘상주서도회’ 창립
마음의 고향 상주서 첫 귀향전 마치고 ‘상주서도회’ 창립
  • 김영태
  • 승인 2019.09.0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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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대구 첫 개인전 이후 8년 만
최초 공개 墨畵 등 40여점 선봬
교육원 강당서 서도 특강 열고
글씨에 대한 지역민 관심 확인
日 초대전·獨 전시 잇따라 개최
대구지역 향토작가 초대전 참여
3國 교류전 출품 등 활동 활발
소헌선생작품-홍익인간
70년대 후반의 소헌 선생 작품 ‘弘益人間(홍익인간)’, 33.0x134.0cm, 1976, 소헌미술관 소장.
 
상주귀향전
상주귀향전(1976.9.24~9.30.상주문화원) 전시기간 중 상주교육원에서 서도특강과 실기강좌를 하고 있는 소헌 선생.

 

소헌 김민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25)-장년시절16. 1976(69세)

1976은 선생의 나이 69세 되던 해였다. 칠순을 앞두고 있었지만 선생의 서도에 대한 열정은 오히려 더욱 활기를 띠었다. 우선 「봉강연묵회(鳳岡硏墨會)」라는 명칭으로 9회 회원전(1976.4.15~4.20)이 대구시립도서관 전시장 전관에서 열렸다. 김세헌, 김연권, 안영환, 박희영, 조용주, 박선정 제씨 등 60명의 작품 92점이 출품되었다. 소헌 선생의 찬조작품으로 「주자경재잠(朱子敬齋箴)」10곡병이 전시되었다.

1976년은 캐나다 몬트리얼 올림픽에서 양정모 선수가 금메달(레슬링,자유형 페더급)을 받은 해이다(76.8.7). 대한민국 정부수립(1948) 후 올림픽 첫 금메달이다. 온 국민이 열광했다. 선생은 40년 전 일제강점기때 베를린 올림픽(1936)에서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日章旗)를 가슴에 달고 마라톤을 제패했던 그때 나라 잃은 민족의 울분을 토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러했지만 지금 태극기(太極旗) 휘날리며 대한민국을 세계만방에 펼친 쾌거에 마음껏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온 국민의 기쁨이 가라앉기 채 15일이 못되어 판문점에서 북한 병사의 도끼만행사건이 발생(76.8.21)했다. 선생은 남북(南北) 분단의 원통함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민족이 좌우(左右)로 분열되어 남북으로 분단된 지 30년이 지났다. 통일은 요원(遼遠)하기만 한 것인가. 선생은 시름에 빠져 한동안 우울한 나날을 지냈다.

◇상주귀향전 1976.9.24~9.30

소헌 선생이 청소년 시절을 보낸 곳은 상주(尙州)이다. 그곳에서 36년 간의 일제강점기를 겪고 광복(1945)을 맞았지만 국토는 남북(南北)으로 분단되고 국민은 좌우(左右)로 분열되어 파쟁하니 북쪽 좌익 세력의 남침(1950)으로 민족상잔의 6·25동란을 겪어야만 했다. 선생의 청년기는 그야말로 암울한 격동의 시절이었다.

1953년 소헌 선생이 46세 때에 대구로 이주하여 이곳에 정착한지 어언 23년의 시간이 흘렀다. 강산(江山)이 두 번 변한 세월이다. 그동안 오로지 서도(書道)의 외길로만 걸어왔다. 1976년 가을에 선생은 고향 지인(知人)들의 초청으로 상주에서 귀향전(歸鄕展)을 가지게 되었다. 그곳 유지인 화산(華山) 이대우(李大雨)씨와 당시 상주군 교육장이던 김해인(金海仁)씨, 경북도 교육위원 이희영(李熹榮)씨, 산림조합장 조성학(趙誠學)씨 등 친지들의 권유에 못 이겨 마련한 전시회였지만 큰 보람이 있었다. 1968년 대구에서 첫 개인전 이후 8년 만에 두 번째 개인전을 고향에서 갖게 된 셈이었다.

9월 24일부터 일주일 간 상주문화원에서 열린 이 전시회에는 10곡병 ‘경재잠(敬齋箴)’, ‘도리원서(桃李園序)’, ‘반야심경(般若心經)’, ‘극기명(克己銘)’ 등 병풍 4점과 ‘정관자득(靜觀自得)’, ‘홍익인간(弘益人間)’, ‘법천칙지(法天則地)’, ‘오애오려(吾愛吾廬)’ 등 전(篆)·예(隸)·해(楷)·행(行)·초(草)를 골고루 쓴 액자와 족자등 모두 40여점을 전시했다.

선생이 태어나 유년(幼年)시절을 보낸 곳은 경북 의성군 사곡면 오상동이었지만 성장하고 청년(靑年)시절을 살아온 상주는 고향과 다름없었고 그곳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상주 귀향전은 더욱 감회가 깊었다. 전시장에는 첫날부터 어린시절의 친구들이 붐벼 성황을 이루었다.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나누게 된 고향 친구들은 어느새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히고 머리카락은 희끗회끗해 세월의 무상(無常)함을 절감했다.

전시회 개막 때 선생은 나이답지 않게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린시절 철없이 뛰놀던 반가운 얼굴들과의 만남, 선친(先親)의 뼈가 묻혀있는 땅, 성장하면서 몇 번이나 역사의 변천을 체험했던 곳이 바로 이곳 상주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때의 그 악동들의 동안(童顔)은 간곳이 없고 모두 노안(老顔)이 돼 있었으며 선생 또한 성하지 못한 몸을 이끌고 그들 앞에 서야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선생은 눈물을 훔치면서 어려운 가계(家計)에도 엄격한 유가(儒家)의 가풍을 지키며 늘 인자(仁慈)하게 일깨워 주시던 선친(先親)을 떠올렸고 마음 깊숙이 선친께 고개를 숙였다.

선생은 귀향전(歸鄕展)에서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생애 처음으로 묵화(墨畵) 몇 점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 무렵 선생은 소일(消日)삼아 묵화를 치는 일이 많아졌고, 이에 대해서는 밖으로 별 티를 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묵화를 작품으로 내어 보이니 글씨만 쓰는 줄 알았던 친지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선생이 귀향전(歸鄕展)에 쏟는 정성이 얼마나 컸는지는 전시 구성에서 드러났다. 소헌 선생은 전시 기간에 밤 시간을 이용해 상주교육원 강당에서 특강으로 서도 강좌를 열며 귀향전에 의미를 부여했다. 옛 친구들과 서도에 대한 이야기도 나눌 겸 서도에 관심이 많은 분들과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이 강좌에는 밤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밤이 깊도록 특강을 하고 실기(實技)로 글씨를 쓰기도 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이곳 사람들의 서도에 관한 관심이 크게 고조돼 있다는 점이었다.

상주에서 대구로 돌아오면서 선생은 너무 늦게 귀향전을 가졌다는 후회가 있었으나 참으로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곳 고향 사람들에게 뭔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졌다. 선생의 전시회가 계기가 되어 상주에서 이대우(李大雨) 선생과 김기탁(金基卓) 교수의 주도로 「상주서도회(尙州書道會)」가 창립되었다. 마음껏 축하를 했고 또한 무궁한 발전을 기원했다.

귀향전을 마치고 대구로 온 선생은 너무나 많은 분들의 고마움에 가슴이 뜨거웠다. 고향 친지들과 그곳 유지들의 배려 그리고 대구와 타지에서 왕림해 준 분들에게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선생은 이분들에게 빠짐없이 일일이 자필로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 금반(今般) 귀향전(歸鄕展)에 제(際)하여 물심양면(物心兩面)의 협조(協助)와 후의(厚意)에 충심(衷心)으로 경건(敬虔)한 사의(謝意)와 함께 만강(滿腔)의 경의(敬意)를 표(表)하는 바입니다. 연이(然而)나 귀소시(歸巢時)에는 일일이 진배사사(進拜謝辭)드리지 못하였음을 죄송(罪悚)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내내(來來) 변함없는 지도편달(指導鞭撻)을 바라며 귀하(貴下)의 가정(家庭)에 만복(萬福)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1976年 10月 4日 김만호(金萬湖)上」

상주귀향전을 마치고 난후 일본 아마사끼(兵庫)에서 선생의 초대 개인전이 있었고, 독일에 작품 15점을 송품하여 뮌헨에서 개인 전시회를 열었다. 건강이 여의 찮고 독일은 너무 먼거리라 참석하는 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기까운 일본도 첫 해외(海外)전인데 참석 못해 아쉽고 안타까웠다. 영남일보에서 개최한 제1회 향토작가 초대전에 작품을 초대전시하였고, 8군사령부 초대전에 출품하여 감사장를 받았다. 이 해에 한?중?일교류전에 출품하는 등 작품활동을 분주하게 하였다.

1976년의 가을도 그렇게 바쁘게 저물어 갔다. 선생은 그 해 겨울 한적한 시간에 어린시절 서도에 입문(入門)케 해주신 창랑(滄浪) 김희덕(金熙德) 선생을 생각하면서 스승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잠겨 올라왔다. 그 때 창랑 선생이 가르친 초심(初心)으로 어린시절의 꿈에 다다를 수 있기 위해 더욱 정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창랑 김희덕 선생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상주(尙州)에 다녀온 탓이기도 했다. 창랑 선생은 소헌 선생이 상주에서 9세 되던 해에 서도(書道)에 눈뜨게 해 주었고 황자원(黃自元)의 임서(臨書)를 일찍이 익혀 주었다. 또한 창랑 선생은 지금까지도 즐겨쓰고 있는 글귀를 가르쳐 주었다. 「靜觀自得(정관자득)」, 「重思神通(중사신통)」이라는 글귀가 바로 그것이다. 「花開傍樹猶生色 鶯出凡禽不敢啼(화개방수유생색 앵출범금불감제) 꽃이 피니 옆에 있는 나무들이 오히려 빛이 나고, 꾀꼬리가 날아오르니 무릇 새들이 감히 울부짓지 못한다」라 찬(讚)해 주신 기억도 새로이 다가왔다. 그러나 소헌(素軒)은 아직까지 김희덕 선생의 기대에 보답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자책감으로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선생은 그 때까지 연구해 온 왕희지(王羲之)를 더욱 파고 듦으로서 스승에게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문듯 떠올랐다. 선생은 왕희지 서체(書體)를 더욱 깊이 연구하는데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예감(豫感)에 마주치게 된 것이다. 창랑 선생이 숙제로 넘겨준 계시(啓示)였다. 이 해의 긴 겨울도 늘 탈진습기(脫塵習氣)를 기도하면서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추구하는 노력에 매진했다. 선생의 이 모든 자각은 그 염원(念願)이 창랑 김희덕 선생의 은덕(恩德)이라는 숙연한 마음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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