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한 잔
명작, 한 잔
  • 승인 2019.09.16 21:2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현숙
시인
밝고 환한 보름달이 둥실 떠오른다. 명작이다. 올해 추석은 달이 유난히 더 크고 생생해 보인다. 나뿐 아니라 보름달을 바라보며 간절하게 소원을 빈 사람들의 바람이 모두 다 이루어졌으면 한다. 그리고 그 소원이 달이 차고 기울어 다시 차오르듯 하루하루 살아내는 힘의 원천이 되기를 빌어본다. 음식 준비며 손님을 치러야 하는 일까지 준비할 것들도 많고 고된 길이라지만 그보다는 설레는 마음이 더 크게 다가온 추석 명절이었다. 길게는 반년 짧게는 일상처럼 늘 부대끼며 사는 가족. 친지들과 둘러앉아 나눠 먹는 명절 음식은 일상에서 먹는 것과는 맛과 향이 다른 ‘특별식’이다. 주로 기름진 음식들이 대부분이라 칼로리가 걱정되기도 하지만 ‘추석이니까’, ‘명절이니까’ ‘다시 또 언제 먹어볼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먹다 보면 과식하기에 십상이다. 그래서일까. 명절 연휴가 후반부로 갈 때 즈음 떠오른 기사들을 보면 명절 극복하는 방법부터 명절 음식 칼로리, 남은 명절 음식 활용법, 기름진 음식 먹고 체했을 때 등, 카톡이나 문자 인터넷 검색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추석 연휴가 마무리돼 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남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집까지 무사히 잘 도착했느냐’고 묻기도 전 대뜸 동생은 ‘누나 고마워’ 한다. 목회하며 신의 아들로 살다 보니 막상 친가에는 자식 노릇 며느리노릇 제대로 한 번 못할 때가 많다며 아쉬워한다. 더군다나 명절이면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먹는 음식들로 인해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하고 더부룩할 때가 잦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내가 준 매실차를 즐겨 마신다는 것이다. 일반 매실차와는 보기엔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막상 혀끝에 닿는 느낌부터, 다른 것과는 차별화된 작품을 마시는 것 같다며 ‘명장의 명작’을 마시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매실의 향이 살아 있고 오랜 시간 정성을 들인 맛이 마실 때마다 느껴진다며 그 귀한 작품을 나눠줘서 고맙다는 것이다. “누나, 배가 터지도록 소갈비를 뜯고 왔는데 왜 헛배만 잔뜩 부른지 모르겠어. 명절이라 그런가. 아니면 나도 늙는지. 벌써 내가, 나를 앞세워 친척들이며 집안 어른들 인사 다니러 가자며 애쓰시던 아버지 나이가 되었어. 그때 좀 따라다녀 줄걸 그랬어. 아내도 아이도 내 뜻 대로 잘 안 되는 것 같아 누나. 왠지 맘이 쓸쓸하고 헛헛하고 그래. 그럴 때 누나가 준 명작, 한 잔 음미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져. 그때 들었던 마음을 감사함으로 꼭 표현하고 싶어서 전화한 거야.”

초승달부터 보름달까지 변화하는 찰나의 순간들을 정지된 이미지로 보여주는 아티스트 고 백남준의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는 작품이 생각난다. 달의 주기를 12대의 텔레비전으로 형상화한 후 열두 단계의 시간을 동시에 바라보며 관람자로 하여금 시간의 길이와 깊이, 순간성과 영원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하는 작품이다. 동생의 전화를 끊고 나는 한참 동안 먹먹해졌다. 달은 그냥 달이라서 좋다. 해와 달리 오래 바라보고 앉았어도 눈부시지 않아서 더욱 좋다. 모양이 변하든 변하지 않든, 초승달이든 보름달이든 어둠을 밝히는 그윽한 빛이며 그저 하늘에 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희망을 품고 소원을 빌게 하듯 가족이란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미디어 아트 비평가인 에디트데거의 말이 동생의 말과 함께 내 맘에 달빛처럼 스며온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는 이 제목은 빛의 유일한 원천이 달과 별이었던 인류 태초의 시절을 가리킨다. 현대의 삶은 그 시절의 기억을 거의 잃어버리고 텔레비전의 차가운 빛이 달빛을 대신하게 되었다’던. 보름달처럼 다시 또 언제 만날지 모를 그리움을 한 아름 담고 오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시는 볼 수 없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더해진 탓이었는지 떠날 때의 마음보단 돌아올 때의 마음이 더 깊고 무거워진 느낌이다. 명절 음식을 먹고 체했을 때 바늘을 흰 머리카락 위로 한 번 쓱쓱 문지르시고는 다시 호롱불에 달군 후 손톱 아래를 찔러 한 방에 따 주시던, 검붉은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면 그제야 마음을 쓸어내리며 등을 토닥여주시던 외할머니가 다시, 달 속에서 박꽃처럼 환하게 피어난다. 달이 기울 듯 명절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새롭게 다가올 가을을 기대하며 평화로운 오늘을 맞이하기를 기도한다. 이제 슬슬 제자리로 돌아올 준비를 해야 할 시점이다. 먹고 마시고 쉬며 좀 둔해진 몸과 어딘가로 떠나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헤매고 있을 그 마음 한 조각마저 다 데리고.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