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녘의 뜰
서녘의 뜰
  • 승인 2019.09.30 21:0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현숙 시인
문현숙 시인
뜰 앞에 내려선다. 화단에 피어있던 꽃들이 저무는 노을 속으로 치열했던 하루를 마감하느라 분주하다. 아름답게 꽃 피던 시절을 접고 생의 모든 것들을 과거라는 공간 속으로 떠나보내려 하고 있다. 가을 저녁이다.

지난 주말, 직장으로 인해 집을 떠나 서울에 사는 아들과 함께 남한산성을 올랐다. 성곽을 둘러보며 바라본 하늘, 그 광경에 넋을 잃고 한참을 지켜보다 내려온 기억이 생생하다. 늘 뜨고 지는 해지만 늘 다른 모습을 보여주던 노을의 풍경이 얼마나 가슴을 설레게 하던지. 그때, 아이와 함께 바라보던 저녁노을은 아직도 마음 한켠 똬릴 틀고 들앉아 머물러 있다.

붉은 노을이 서서히 물들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마법과도 같은 노을 탓이었을까. 좀처럼 힘들다는 내색 한 번 하지 않던 아이였는데. 세상이 숨기고 있던 또 다른 모습의 풍경을 보여주듯 아들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엄마, 일을 대할 때마다 미숙함을 느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 공허하기도 해. 일이 손에 익지 않은 탓인지, 집까지 일거리를 들고 와서 해도 끝이 없어. 먹는 것도 그래. 혼자 살면 맘껏 골라 먹고 살 줄 알았는데. 좋아하는 피자 한 판을 못 시켜 먹어. 왜냐면 반도 넘게 버려야 하거든. 치킨도 그렇고 해물찜 같은 건 아예 먹어볼 생각조차 못해. 혼자서는.”

나는 노을이 품어 안고 있는 거대한 도시의 야경 속으로 마음을 기대놓으며 생각했다.

“네가 느끼는 세상이 아빠도 엄마도 우리 모든 인간들이 머리 맞대고 사는 현실이 아닐까. 네가 느끼는 공허감, 그것은 우리가 모두 겪는 진실이겠지. 세상을 살아가면서 얼마만큼 공허하게 뚫린 구멍을 메우고 사느냐가 참다운 삶의 기준이 되겠지. 너로 인해 어쩌면 아빠 엄마의 마음도 가을바람이 휙휙 지나가는 공터 같을지도 몰라.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거야 아들아.”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읽었는지 아이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언뜻 묻어나는 걸, 엿볼 수 있어 마음이 놓였다.

서녘 하늘이 온통 불붙고 있다. 화단의 풀들과 나무들도 하나같이 홍조를 띠며 저녁의 붉은 노을 속으로 타들어 간다. 화단의 가장자리를 지키느라 쌓아놓은 돌담 사이사이로 강아지풀들의 낮은 행렬이 가을바람에 서성인다. 저 하늘을 건너 아이 곁으로 날아가 저녁밥을 지어 먹일 수 있다면…….

아들이 있던 방, 침대 머리맡에 놓인 탁상달력 속 계절은 지난 4월에 머물러 있다. 그 앞에 로댕처럼 앉아 심재휘 시인의 ‘행복’이라는 시의 전문을 나지막이 되뇌어 본다.

“집을 나서는 아들에게/ 보람찬 하루라고 말했지// 창밖은 봄볕이 묽도록 맑고/ 그 속으로 피어오르는 3월처럼 흔들리며/ 가물거리며 멀어지는 스무 살 뒷모습에 대고/ 아니다 아니다 후회했지// 매일이 보람차다면/ 힘겨워 살 수 있나// 행복도 무거워질 때 있으니// 맹물 마시듯/ 의미 없는 날도 있어야지/ 잘 살려고 애쓰지 않는 날도 있어야지”

어떤 대상이든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한다는 것이 때론 삶의 방향 감각을 잃게 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다 보면 진짜 최선을 다해야 할 일이 뭔지 모를 수도 있겠다 싶어진다. 행복도, ‘열심히’라는 말도,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리란 다짐도 매일 과다하게 복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본다. 행복도 무거워질 때가 있고, 잘 살려고 애쓰지 않는 날도 있어야 한다는 시인의 말이 아들의 마음에도 전해져 위로되기를 바라본다.

‘해가 지는 것을 보려면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해가 지는 쪽으로 가야 해’라는 생텍쥐페리의 글귀처럼 누구나 원하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는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하루에 한 가지만 열심히, 꼭 최선을 다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기, 그리고 내 안에 또한 아들의 마음 안에 개미와 베짱이가 함께 공존할 수 있었으면 한다. 이런 방향으로 인생을 리셋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날, 닫아걸어 두었던 아들의 방문을 활짝 열어젖혀 여물어가고 있는 가을바람을 한껏 초대해 본다.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