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도란 끝없는 신비의 세계” 일흔에도 쉼없이 정진
“서도란 끝없는 신비의 세계” 일흔에도 쉼없이 정진
  • 황인옥
  • 승인 2019.09.30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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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헌평전> (27)-노년기(老年期)1. 1977(70세)
5세부터 밥숟갈과 함께 붓 잡은 소헌
“고희를 맞도록 글씨를 써 왔지만
만족할 만한 경지엔 아직 못 이르러”
고희 기념전 앞두고 작품 마무리 매진
書는 미적 차원 넘어 ‘생명’ 담겨 있어
깊은 수양 통한 심정필정의 집약체
소헌-김만호
‘서도인은 우주의 진리를 캐는 광부(鑛夫)’라고 비유하는 소헌(素軒) 김만호(金萬湖). 그의 정갈한 옷 매무새에서 고고한 선비의 기풍이 넘친다. 1977(丁 巳).




70년대 후반은 소헌 선생이 노년기에 접어드는 시기였다. 노년기는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남은 삶에 대한 의지를 새롭게 하는 시기다. 소헌 선생도 그랬다. 선생은 지난 10여년을 돌아보며 그동안 온 국민이 각기 허리띠 졸라 매고 땀흘려 열심히 살아왔다는 감회에 젖었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는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정책으로 수출목표 100억불을 달성했다(1977). 연간 수출 1억불 달성(1964) 이후 13년만에 100배의 경이로운 성장을 이루어 이미 수출(輸出) 입국(立國)의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고 있었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1977년은 소헌 선생이 70세가 되는 해이다. 때마침 매일신문에서 「지난날을 돌아보며」라는 제목(題目)의 회고록(回顧錄)을 선생에게 의뢰해 와서 집필(7회 연재,1977.2.10~3.22)을 하게 되었다. 이 연재의 1회 첫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붓을 쥐는 법은 어린아이들이 숟가락 쥐는 법을 배우는 것과 같다”는 선친의 말씀을 새겨 들으며 내가 붓을 쥐기 시작한 것은 5세 때인 1913년 쯤이었다. 붓을 쥠과 아울러 나는 이때부터 천자문(千字文)을 읽고 외우기 시작했으며 글을 분판(粉板) 위에 그대로 베껴 쓰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배일사상(排日思想)이 충만했던 우리 집안에서는 일제(日帝)에 의한 신학(新學)은 엄두도 못낼 일이었으며, 오직 한학(漢學) 만이 유일한 학문이었다. 그만큼 한학은 집안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나는 이후 성년이 될 때까지 계속 글을 읽고 쓰며 한학에 정진했다. 천자문을 배운지 얼마되지 않아 글자의 한 획까지 휑하게 외울때는 주위에서는 온통 신동(神童)이 났다고 야단들이었다. 그러나 어려운 가계(家計) 때문에 서당에는 가보지 못하고 오직 선친께서 글자를 가르쳐 주셨으며 묻는 것도 선친 뿐이었다. <중 략>. 9세 때인 1917년에 당시 필사(筆師)이던 김희덕(金熙德) 선생이 집에 와서 나의 글씨를 보고 놀라와 하시며 독선생으로어언 1년 동안이나 글씨를 지도해 주셨다. 이것이 내가 본격적으로 서도(書道)를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글씨는 동리 어른들이 자주 칭찬해 주던 보기좋게만 쓰는 것을 넘어서 나는 글씨가 어떻게 해서 생겨 났으며 이렇게 하여 다듬어졌구나 하는 것까지도 스스로 깨닫기 시작했다. <하 략>.」 (매일신문,1977.2.10)

그리고 이 연재의 마지막 7회 끝 부분에 선생은 이렇게 기록했다.

「… 올해는 내 나이 일흔살이 되는 해이기도 해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닥아오는 봄날 5월 쯤해서 나의 고희(古稀) 전시회를 한번 가질까 구상해 보기도 한다. <중 략>. 지금까지 본 연재를 통해 말을 너무 많이 했는 것 같다. 이때까지 좋은 글씨 하나 못 남기면서 서도(書道)에 대해 감히 언급한 것은 너무나 경솔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보다 훨씬 훌륭한 후진이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필(筆)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서도(書道)란 아직까지도 확실히 알 수 없는 신비(神秘)의 세계이며 그것이 무엇인지 확연히 잡을 수 없는 장막(帳幕) 속에 싸인 보물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을 발견하는 날까지 나는 나의 붓 끝의 힘을 조금도 쉬게하지 않을 것이며 쉽고 천연적이고 과학적이고 대중적인 서법(書法)을 연구하여 널리 쓰이겠금 노력할까 한다. 옛말에 서도(書道)는 66개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는 말과 같이 오늘도 그 고개를 넘으려고 도전하고 있다」라고 마무리했다. (매일신문,1977.3.22)

◇고희(古稀)맞는 소헌(素軒)

그리고 영남일보에서 기획한 ‘한 길’시리즈에서 소헌 선생을 초대하여 아래와 같이 취재했다.

「한 길-고희(古稀)맞는 서예인(書藝人) 소헌(素軒) 김만호(金萬湖)씨. 밥숟갈과 함께 붓을 잡아 이제 고희(古稀)에 이른 소헌 김만호. 아직도 서예의 신비를 깨닫지 못해 ‘연구한다’고-.

“인간은 태어나면 삼라만상으로부터 침입을 당하고, 세상 미묘한 이치는 옳은 길 찾기가 힘들구나. 이익을 탐하면 몸에 해(害)가 따르기 마련이고, 안빈하면 즐거울 수가 있다. 한발 디디는 일을 조각 땅 밟듯 두려워 하고, 말 한마디를 천금같이 두려워 하라. 평생의 참된 길을 먼데서 구하겠는가, 바로 지금에 있다.”

<一下人間萬像侵/玄機微杳政難尋/貪利終隨身上害/安貧自有樂中吟/行步常想危片地/發言豫愼重千金/平生眞路何求遠/渡世百年卽在今>.

삼십쯤 됐을까. 그 때 내가 지었지요. 서예인 소헌(素軒) 김만호(70·상주한의원장)씨는 기자의 취재에 몇 번을 사양하고 거절하다 말을 이었다. 남에게 자랑할 것이 여의찮고 여러사람에게 자기를 내놓기도 쑥스럽다는게 거절의 이유였다. 더 큰 이유는 고희(古稀)를 맞도록 글씨를 써 왔지만 만족할 만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데 있다고 했다. <중 략>. “확실히는 알수 없는 일이지만 서도(書道)란 신비의 세계가 있는 것 같아요. 잡힐 듯 하면서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 신비의 세계를 파악할 때까지 연구하고 노력해야지요”. 잡힐 듯 말 듯한 신비의 경지를 기자가 잘 알 수는 없으나 강열한 소헌(素軒) 선생의 남다른 집념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하 략>.」 (영남일보,1977.3.20.)

◇나의 길, 그 뜻과 보람

6개월 후 영남일보 일요연재 「나의 길-그뜻과 보람<1>」에서 송의용(宋義用)기자는 소헌(素軒) 선생을 취재하여 다음과 같이 기고했다.(1977.9.4.)

「서도(書道)는 끝없는 유현(幽玄)의 길. 완성(完成)쫓는 구도자(求道者)-

<泰山雄高高有上/ 滄海惟深深又底>

“태산이 높다하지만 그 위에 더 높은 봉우리가 있고, 저 깊은 바다가 깊다 하지만 더 깊은 바닥이 있다”. 이 자작시(自作詩) 한 수로 정진(精進) 70년의 심정을 대신하는 서도가 소헌(素軒) 김만호(金萬湖)씨는 77년 9월 13일 대구시립도서관에서 가질 고희(古稀)기념 개인전을 앞두고 서도(書道)는 ‘갈수록 먼 유현(幽玄)의 길’ 임을 절감한다며 작품 마무리에 여념이 없다.

서도는 인격을 바탕으로 심정을 그리는 ‘심화(心畵)’라고 정의하는 소헌(素軒)은 최근들어 서예(書藝)가 미적(美的)인 면에만 치중하여 조형예술(造形藝術)의 범주에만 머물고 마는 경향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서(書)에는 ‘생명(生命)’이 있음을 강조한다. 서(書)에는 체험을 통해서 신앙적(信仰的)인 요소인 정신의 집약이 요한다. 끝없는 구도(求道)의 고난 위에서만 새로운 지평(地平)이 열리듯 유현(幽玄)의 미지(未知)의 길을 바로 응시하며 자형(字形)을 바르게 하고 필력(筆力)을 기르는 데서 깊은 수양이 얻어져 심정필정(心正筆正)의 원리가 비로소 자기의 체내(體內)에 용해되어 작품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는 엄한 유가(儒家)의 가친(家親) 밑에서 ‘숟가락과 함께(5세때)’ 천자문과 붓을 들고 고된 구도(求道)의 길을 나섰다. 그 때는 종이가 귀해 분판(粉板)에다 썼다. 대자(大字)는 마을 뒷산에 올라가 반석(盤石)에다 빗자루 떨어진 것을 붓 대용으로 삼아 익히기도 했다. 글도 함께 익히며 서도(書道)의 이론을 학문적으로 연구한 것은 물론이다. 이렇게 길을 떠난지도 이제는 60 하고도 5년이 지났다. <중 략>. 9월 13일부터 가질 이번 개인전에는 병풍 등 50여 점을 내놓을 예정. 대구전(大邱展)이 끝나면 여건이 허락하는 한 서울과 광주에서도 한번쯤 전시회를 가질 계획이라고 조심스럽게 밝히는 소헌(素軒)은 평생을 묵향(墨香)과 같이 했지만 오늘따라 묵향이 더 새롭다며 붓을 놓는다. 다시잡은 그의 붓끝엔 ‘완성(完成)에의 의지(意志)’가 파르르 떤다. <송의용 기자>」 (영남일보,1977.9.4)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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