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사랑한 ‘회색의 달인’ 민병헌…대형작 ‘고군산군도’ 첫 선
유럽이 사랑한 ‘회색의 달인’ 민병헌…대형작 ‘고군산군도’ 첫 선
  • 황인옥
  • 승인 2019.11.04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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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자연과 인체展
흑백 아날로그에 40여년 몰두
풍경 재현하는 사진 본질 집중
작업물 여럿 연결한 대형작
밝은톤의 인체 누드도 선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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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헌 전시작 ‘고군산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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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헌 인체누드 전시각.

분명 흐린 회색 풍경인데 세상이 환하게 밝아오는 느낌이다. 정확히 마음속 뿌연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기분. 빠른 속도와 화려함에 길들여진 마음이 일순간 차분함으로 대체된다. 비나 눈 오는 흐린 날에 촬영한 풍경인데 오히려 마음의 안개까지 걷어내는 이 역설 앞에 당혹감이 밀려오지만, 이는 작가 민병헌 사진의 힘이자 그를 한국사진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놓는 이유다. 작가의 흐린 회색빛 사진에서 대상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마법을 경험하게 된다.

그가 “내가 사진을 시작할 때 아날로그 카메라가 일반적이어서 그 방식의 작업을 시작해 40여년이 지났다”다고 포문을 열었다. “흑백 사진은 내 선택이라기보다 내가 놓여진 환경의 결과였어요. 디지털과 칼라가 새롭게 개발되었다 해도 굳이 다시 그 방식을 배울 이유를 느끼지 못했죠.”

강, 잡초, 안개, 나무, 설경, 폭포 등의 풍경은 수묵화, 인체누드는 목탄 드로잉을 닮아있다. 사진과 회화와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이야기. 이는 특유의 회색 톤이 만든 조홧속이다. 이를테면 ‘아날로그 사진이면 모두 회색빛 사진이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작가의 흐린 정서를 담아내는 특유의 회색 톤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독특함이 있다. 그만의 아이덴티티로 인정해야 할 정도로 독보적인 색감이다. 이 독보성이 그를 한국의 사진가 중 유럽과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 하나로 손꼽히게 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동양의 수묵화적인 효과에 대해 대해 작가가 “동양화를 닮았다는 평을 좋아하지도 않고 추구하지도 않는다. 나는 오히려 팝송이나 서양문명을 좋아한다”고 담담하게 반론부터 펼치고는 이내 “내 아무리 서양을 좋아한다고 해도 한국인이라면 가지게 되는 정서가 있을 것”이라며 무의식적으로 개입된 한국적인 정서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작가가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라는 사진에 대한 철학을 밝혔다. 이는 그의 사진론이 찍는 것에 무게중심을 두는 일반론과 차별되는 지점이다. 일년 중 카메라를 잡는 날이 채 열흘이 되지 않을 정도로 그에게 사진을 찍는 순간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물론 한 번에 찍는 양이 많기는 하지만. 찍는 것 외에 작가가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은 암실 작업. 원하는 색감과 분위기를 얻기 위해 암실에서 사투를 벌이는 시간이 작업 전 과정에 비춰보면 절대적이다. 그는 사진을 찍고 인화해 나오는 최종 결과물까지의 과정 전체를 사진예술의 범주 속으로 끌어들이다. “사진을 물에서 꺼내 말리는 과정이 찍는 것 이상으로 중요해요.”

그에게 천하절경의 관광지는 피사체로서의 매력을 상실한다. 누드모델 역시 전문 모델은 사양한다. 주변에서 일상적로 만나왔던 풍경과 작가와 친분이 있는 지인들이 대상으로 선택된다. 풍경과 인체 공히 작가와 교감지수가 딱 맞아떨어지는 지점에서 카메라 셔터가 현란하게 돌아간다. 사진 촬영 전 전제가 되는 익숙함, 즉 공감대에 물이 올라야 하는 것. 특히 그는 비나 눈 오는 흐릿한 풍경이나 인체 누드를 선호한다. 이와 같은 조건이 되기 위해 풍경은 환경이 받쳐주어야 하고, 인체누드는 모델과 충분한 소통과 교감이 선행돼야 한다. 이 점에서 풍경과 인물은 둘이 아닌 하나다. “흐린 날이나 비오는 안개 낀 날의 정서가 나와 맞아요. 내 정서대로 사진을 완성하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의 감성과 인화된 최종 결과물에서 얻은 효과는 정확히 일치한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마음에 각인된 상이 암실의 분투를 통해 거의 정확하게 재현된다. 카메라 셔터를 누른 순간 포착된 상이 필름보다 작가의 가슴에 더 강력하게 각인되고, 그 상을 완벽에 가깝게 재현하려고 노력한다. “암실 작업을 직접 하지 않으면 그 느낌을 절대 표현해 낼 수가 없어요.”

암실 작업은 기술을 예술로 치환하는 과정인데, 작가에게는 일종의 도전이었다. 사진작가가 암실 작업까지 수행하는 경우는 드물어서 스승도 경험도 일천할 수밖에 없었고, 오직 경험을 통한 감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암실에 한 번 들어가면 배고픈 줄도 모르고 이틀 이상을 나오지 못한 날도 부지기수였다. 약품 냄새 나는 어두운 방에서 작업하는 것을 즐기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 “조그만 방에 확대기 하나 놓고 암등 하나 켜고 있으면 그때의 행복감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물속에 있는 필름을 보면 마약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지만 마약 저리 가라에요. 천국이죠.(웃음)”

아날로그 흑백사진만 40여년을 매달렸다. 인화도 여전히 아날로그인 젤라틴 실버 프린트를 고집한다. 흑백에 대한 작가의 변치 않는 믿음을 혹자는 오해하기도 한다. “디지털을 거부한다”고. 하지만 작가에게 아날로그는 고집의 문제가 아닌 상황의 문제. “제가 사진을 처음 찍을 때 아날로그 방식을 배웠고, 아날로그에서 나의 세계를 찾아가고 있는데 디지털이 나왔다고 그쪽으로 가야하는지는 의문이었어요. 그렇게 쫓아가면 평생 끝이 없을 것 같았죠. 저는 작업 초기 처음 카메라를 배우던 시기의 방식을 오래 깊게 몰두해서 끝을 보는 쪽으로 작업을 이어왔어요.”

최근에 그도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대형 작품을 소장하고 싶다는 의뢰가 들어온 것. 하지만 아날로그 방식으로는 불가능한 상황. 그도 인간인지라 “대형 사진의 경우에 한정해 디지털 방식을 채택할 수도 있지 않느냐”며 살짝 마음이 흔들린 것은 사실이다. 가까운 지인들과 의견을 교환하며 장고에 장고를 거듭했다. 그러나 결국 디지털 방식은 시도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대신 주제에 맞는 아날로그 흑백 사진 여러 장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했다.

최근 개인전을 시작한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전시장 벽면에 걸린 대형 작품 ‘고군산군도’가 아날로그로 시도한 대형 작업이다. 작가가 소개하는 최초의 대형 작업. ‘고군산군도’는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에 속한 군도인데, 5년전 작가가 군산에 새롭게 터전을 잡으면서 촬영한 고군산도 사진들이다. 이 사진 12장이 유기적으로 엮여 ‘고군산군도’로 탄생했다.

“작품에 메시지나 주장을 개입시키지 않는데 의외로 여러 장의 사진을 하나의 작품으로 모아 놓으니 이야기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아요. 한 장일 때와 다른 다양한 효과들을 경험하면서 앞으로 이 방식으로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겠다 싶어요.”

소위 말하는 배고픈 사진을 40여년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다. 그 첫째는 암실 작업에 대한 매료이며, 두 번째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세상을 훔쳐보는 스릴 때문이다. “카메라 렌즈로 대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훔쳐보는 것 같은 은밀함이 있어요. 자연이든 사람이든 저 홀로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있어요.”

40여년의 부력을 가진 그이지만 여전히 “안되는 부분들이 보인다”고 했다. 겸양인가 싶었지만 그는 진지했다. “되는 부분도 있고, 안 되는 부분도 있고, 영원히 안 될 것 같은 부분도 있어요. 그때 안 되는 부분을 고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안 되는 부분이 테크닉의 문제가 아닌 나라는 인간 자체의 문제인 거죠. 그래서 영원이 미결인 채로 계속 하는 수밖에요.(웃음)”

사진이 발명될 당시 사진의 본질은 현실의 재현이었다. 가장 사실적인 사진을 담아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작가가 사진에 개념을 추구하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과 사진예술의 다양성이 확보되면서 사진의 역할이 확장일로에 있다. 사진과 현대미술, 사진과 다양한 매체의 결합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작가는 사진이 발명될 당시의 본질이었던 ‘사실적인 사진’을 여전히 견지한다. 이 사실성에 아날로그적인 방식에 작가의 감성을 덧입힌다. 이를테면 사진을 ‘어떻게 보는가,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해당하는 매체, 재료, 기법의 문제로 접근하기보다 대상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에 집중하겠다는 것.

그가 “내가 사진을 시작했을 때는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사진이야말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고 시대상황을 언급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진을 놓치지 않을 작정이다. “사진이 예술로써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게 됐어요. 그러나 나는 본 것을 재현하는 시절에 사진을 시작했고, 그것만으로도 하고 싶은 것이 많다고 생각해요. 암실 작업을 자연이든 인간이든 그냥 나는 아름답게 보여줄 뿐이죠. 비록 지루하고 촌스러울지라도.” 회색의 달인으로 불리는 민병헌의 ‘자연과 인체’전은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서 12월 22일까지. 053-766-3570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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