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상 수상작 이문열 ‘금시조’ 영감을 주다
동인문학상 수상작 이문열 ‘금시조’ 영감을 주다
  • 김영태
  • 승인 2019.11.18 21: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31)-노년기(老年期)5. 1980(73세)~1981(74세)
서예술 다룬 중편 집필 전
소헌 자택 방문, 자문 구해
“주제와 정신적 바탕 영향”
연서회로 개칭, 현판 손수 제작
회원 167점 출품 대형전 갖고
소헌은 日서 초대개인전 열어
봉강연서회-현판
소헌 선생이 「鳳岡硏書會(봉강연서회)」 현판을 직접 제작하여 만촌동 신축 건물 대문에 걸었다(1980.5.12). 현판식 때의 사진 오른쪽이 소헌 선생, 왼쪽의 고의환 봉강연서회장과 가운데 채약 박혁수.
 
정면에서촬영한만촌동건물
소헌 선생은 대구시 수성구 만촌 2동(998-17)에 2층 새 건물을 신축하여 입주했다(1980.4.25). 이 곳에서 작고(1992)할 때까지 13년 간의 삶을 살았다. 정면에서 촬영한 건물 사진(현존 無).
 
봉강연서회의-당훈
신유년(辛酉,1981) 가을에 소헌 선생은 이사한 만촌 봉강재(鳳岡齋)에 봉강연서회의 「당훈(堂訓)」을 휘호하여 액자(額子)로 표구해서 새 집에 걸었다. 봉강연서회 당훈(堂訓)은 「忠孝勤儉(충효근검) 禮義廉恥(예의염치)」이다.

◇대봉(大鳳)에서 만촌(晩村) 새터(新基)로

경신년(庚申,1980)은 소헌 선생이 봉강시대를 접고 만촌동 시대를 시작하는 해이다. 대봉동의 ‘봉강재(鳳岡齋)’가 대구의 동서(東西) 관통도로를 뚫는 도시계획에 의해 확장도로(현 대동로)에 편입되어 건물이 반이상 헐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20년의 시공간(時空間)을 지내온 봉강 터를 떠나 선생은 새 터로 자리를 잡아 이전을 해야 했다.

필자는 봉강재(鳳岡齋)가 있는 대봉 1구(방천시장)의 기억들이 있다. 초등학교(삼덕) 6년, 중·고등학교(경북중·고) 6년과 대학(영남대) 시절을 보냈고, 그 집에서 결혼(1974)하여 다음해 첫 애(聖勳)가 나고 그 1년 후 분가(分家)를 했다. 필자로서는 그 곳에서 살왔던 20년의 시간과 공간, 장소의 흔적들이 뇌리에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시절 동네 개구쟁이 소꼽친구들과 여름엔 방천에서 발가벗고 물고기 잡으며 수영하고, 가을에는 메뚜기 잡고 미꾸라지 잡았던 수성들, 겨울에는 얼음판에서 앉은뱅이 스케이트 탔던 수성천(壽城川)…, 방천시장(防川市場)을 휘젓고 뛰어 다녔던 시장 바닥과 골목들이 아직 그대로 살아있다. 그 때 같이 놀던 동무들은 모두 출세를 했다. 이미 작고한 친구도 있지만 그 후손이 운영하고 있는 상점이 지금도 여럿이 있다. 어쩌다가 한번 들리면 그 시절의 감회에 젖어 선친(先親)과 모친(母親)을 그리워 하면서 한참의 시간을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도 한다.

1978년 소헌 선생은 수성구 만촌동(만촌2동 998-17)에 부지를 매입하여 새 터를 마련했다. 1979년에 건축설계(필자가 설계)를 하여 2층의 주택건물을 신축하고 1980년 4월 25일에 입주(入住)했다.

선생의 비망록에 「무오(戊午1978) 추(秋) 만촌(晩村) 정기(定基), 기미(己未1979) 5월(五月) 기개(基開), 경신(庚申1980) 4월25일(四月二十五日) 입택(入宅)」이라 기록되어 있다.

27년간 대봉동에서의 생활이 만촌동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당연히 ‘봉강연서회’도 대봉(大鳳)에서 만촌(晩村)으로 이전되었다.

‘鳳岡硏書會(봉강연서회)’ 현판(懸板)은 소헌 선생의 자필로 직접 서각(書刻)을 했다. 각(刻)을 할 때 필자도 옆에서 거들었던 기억이 있다. 대봉동에 걸려있던 ‘尙州漢醫院(상주한의원)’ 현판의 뒷면에 각(刻)을 하였다. 당시에 나무가 귀해서 뒷판에 했는지 소헌 선생의 또 다른 뜻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뒷면의 ‘尙州漢醫院(상주한의원)’ 현판은 그 후 2019년에 문강(文岡) 류재학(柳在學)이 복제 서각(書刻)하여 소헌미술관에서 보존하고 있다.

‘鳳岡硏書會(봉강연서회)’ 현판식은 1980년 5월 12일에 했다. 고의환(봉강연서회장), 김대환(부회장), 이종희(同仁회장), 김영훈(총무), 박혁수(간사), 김정자(正心회장) 제씨 등 회원들이 참석했다.

이 해(1980)에도 다양한 전시들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먼저 일본거류민단의 초청으로 일본 다카라즈카(寶塚) 초대개인전이 열렸다. 안중근 의사 어록을 포함한 소헌 선생의 최근작품 병서, 횡액 등 10여점의 송품 전시회였다.

지난(1979년) 연말 ‘봉강연묵회’의 명칭을 ‘봉강연서회(鳳岡硏書會)’로 개칭(1979)한 이후, 1980년 5월에 제13회 봉강연서회원전(회장,고의환)이 대구시민회관 대전시실에서 개최되었다. (1980.5.1~5.6). 회원 75명의 작품 167점이 전시된 대형 전시회였다. 소헌 선생의 찬조작품 횡액(橫額) 「회재선생개과잠(晦齋先生改過箴)」 등이 출품되었다.

이 시기는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1979.10.26)한 이후 이른바 3김(김종필,김영삼,김대중)시대가 펼쳐지던 때 였다. 시국은 그야말로 혼란 상태였고 각종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호남 광주에서는 학생시민의 대규모 반정부 데모사태가 발생(5.18광주민중항쟁)했고 광주사태는 인접 시군(市郡)으로 확대되어 과격화되어 갔다. 정부는 비상계엄령(계엄사령관,이희성)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를 신설(위원장,전두환 정보부장)하여 진압에 노력을 기울였다. 8월에 결국 최규하대통령이 하야(1980.8.16)했다. 전두환 국보위위원장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당선(8.27)되어 11대 대통령으로 취임(1980.9.1)하였다. 이로서 대한민국의 제5공화국 시대가 도래(到來)하였다.

소헌 선생은 신유년(辛酉,1981)에 봉강연서회의 「당훈(堂訓)」을 휘호하여 액자(額子)로 표구해서 이사한 만촌 봉강재(鳳岡齋) 새 집에 걸었다. 당훈은 「忠孝勤儉(충효근검) 禮義廉恥(예의염치)」이다. 선생의 비망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堂訓(당훈),

忠(충)/盡誠竭力(진성갈력), 孝(효)/養志義口(양지의구), 勤(근)/勞力務篤(노력무독), 儉(검)/去奢從約(거사종약).

禮(예)/節文仁義(절문인의), 義(의)/由仁得宜(유인득의), 廉(염)/不貪利財(불탐이재), 恥(치)/慙心辱耳(참심욕이).」

소헌 선생은 이곳 만촌에서 작고(1992년)할 때까지 13년 간의 삶을 살았다. 대봉동에서의 27년 간의 삶을 합해서 40년 간의 서도(書道) 외길이 대구 대봉(大鳳)의 봉강재(鳳岡齋)와 만촌(晩村)의 봉강재(鳳岡齋)에서 이루어졌다.

◇소헌의 서예술(書藝術)과 소설 ‘금시조’

소헌의 서예술은 문학가들의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 소설가 이문열이 대표적이다. 이문열의 소설 ‘금시조(金翅鳥)’의 주제(主題)가 되는 서도론(書道論) 및 철학(哲學)의 정신적 바탕은 소헌 선생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금시조’는 소설가 이문열 작가의 나이 33세(1980)에 집필한 중편소설이다. 집필 당시 그는 이태수(李太洙) 시인과 동행하여 만촌동 소헌 선생 자택에 방문하여 몇 차례 자문을 받았고, 자료 한 보따리를 빌려가서 학습하고 한 달 후에 회수해 드렸다. 미술평론가 권원순(權沅純) 교수에게도 취재를 했다고 한다.

소설 주제(主題)의 키워드인 심정필정(心正筆正), 비인부전(非人不傳),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 예(藝)·도(道)·법(法), 심화(心畵)와 물화(物畵) 등의 어록(語錄)은 소헌 선생의 서도정신에서 나왔다. 이문열은 <참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인 주제와 예술의 본질을 깊이 있게 성찰하고 고민하던 이 시기에 예술인을 주제로 쓴 첫 ‘예술가 소설’로 서예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주인공인 서예가(書藝家)가 그의 스승과의 사제(師弟)간 예도(藝道) 갈등과 논쟁을 통해서 서예술(書藝術)의 본질을 추구하고자 했다.

등장 인물인 고죽(古竹)과 석담(石潭), 운곡(雲谷), 초헌(草軒) 등은 가공의 인물로 그들의 스토리는 서예술의 본질을 밝혀보기 위해 픽션으로 꾸며진 이야기이다. 다만 작가가 주제를 전개하기 위해 실제 있었던 인물(서예가)들의 아호와 언행 및 행적을 부분적으로 차용하여 엇갈리게 끼워 맞춘 아이디어가 짐작되기는 한다.

작품 속의 주인공인 서예가 고죽(古竹)은 서예술(書藝術)에 관한 견해 차이로 스승인 석담(石潭)과 갈등하게 되고 끝내 결별하게 되지만, 먼 훗날 스승이 자신의 재능을 아꼈다는 사실과 그리하여 남보다 더욱 혹독하게 가르친 사정을 깨우치게 되고, 결국 치기(稚氣)가 어려있는 지난 시절의 작품들을 모두 회수해서 불태워 없애 버린다.

스승 석담(石潭)은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를 중시한 예술가로 도(道)를 중시하였기에 예(藝)의 기예가 강했던 제자 고죽(古竹)은 이에 대한 갈등으로 스승의 가르침에 반발하지만 긴 시간이 지난 후 스승의 깊은 뜻을 뒤늦게 깨닫게 된 고죽(古竹)은 죽음을 앞에 두고 자신의 작품을 태우는 불길 속에서 한 마리의 거대한 금시조(金翅鳥)를 보게 된다는 내용이다. 금시조는 용(龍)을 잡아먹고 일생을 살다가 자신의 몸 속에 용(龍)의 독(毒)이 쌓여 그 독기로 자신의 몸을 태워 자기 심장만 남기고 죽는다는 날개 길이가 360리가 되는 전설 속의 거조(巨鳥)이다. 이문열은 이 작품으로 발표 다음 해(1981)에 15회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