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 스며든 붓글씨…지역 서도 대중화 꽃 피우다
생활 속 스며든 붓글씨…지역 서도 대중화 꽃 피우다
  • 김영태
  • 승인 2019.12.16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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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33) 노년기(老年期)7. 1983(76세)~1985(78세)
한결같은 에너지
1983년 市 미술대전 초대작가상
매월 특강 갖고 작품 품평 도움
1960년대 찾기 어려웠던 서실
10년 후 우후죽순 생겨날 정도
그를 따른 문하생들
1957년 봉강서계회 조직 계기
개칭 거듭하며 현재 ‘봉강연서회’로 활동
반세기 넘는 동안 607명 입계
계해년(癸亥,1983) 정월에 신년 휘호(揮毫)하는 소헌 선생. 좌측 옆이 부인 박경임(朴瓊任) 여사.
 
소헌 선생의 계해년(癸亥年) 신년휘호 작품 「無我(무아)」,100.0x50.0cm,1983. 「雲龍(운룡)」,100.0x50.0cm,1983. 소헌미술관 소장 (2)

7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 활동력이 줄어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제아무리 강건한 사람도 세월 앞에 장사가 없지만 특히나 70대 중후반 이후는 서서히 기력이 쇠해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헌 선생에게는 이 공식마저 비껴가는 듯 했다. 소헌 선생은 오랫동안 지병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70대 중후반을 넘겨도 한결 같은 활동력을 유지하였다. 아마도 서도의 정신을 오랫동안 공부하면서 깨달은 도(道)의 경지가 노년의 선생의 체력까지 받쳐주었는지 모를 일이다. 선생이 76세가 되던 1983년은 다양한 전시를 꾸리고, 수상 소식을 접하였다.

1983년(癸亥) 5월 1일부터 5일까지 제16회 봉강연서회(회장 고의환) 회원전이 대구시민회관 대전시장에서 열렸다. 연서회원 57명의 작품 117점이 전시되었다. 소헌 선생은 횡액(橫額) 「自彊不息(자강불식)」을 격려작품으로 출품하였다.

이어서 5월 29일 봉강서계(鳳岡書?) 취회(聚會)와 봉강연서회(鳳岡硏書會) 총회(總會)가 수성못 호반식당에서 열렸다. 이날 회의의 임원개선에서 봉강서계의 유사(有司)는 김상대(金相大), 유덕길(兪德吉) 그리고 봉강연서회 회장에 박선정(朴善楨), 부회장으로 우상홍(禹相洪)과 김영훈(金永勳), 총무에 양태지(梁泰志), 간사에 유덕길(兪德吉)이 선임되었고 고문으로 담원(潭垣) 고의환(高義煥) 씨가 위촉되었다.

제17회 봉강연서회(회장 박선정) 회원전은 다음해 1984년(甲子) 5월 1일부터 5일까지 대구시민회관 대전시장에서 개최되었다. 회원 53명의 137작품이 출품되고, 소헌 선생의 격려작품 「達觀博通(달관박통)」이 전시되었다.

6월에는 제4회 대구시전(대구직할시 미술대전)이 대구시민회관에서 개막되었다(1984.6.2). 소헌 선생은 대구시전의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작품명은 「邵康節先生觀物吟(소강절선생관물음)」이다.

◇봉강연서회와 봉강서계

봉강연서회(鳳岡硏書會)와 봉강서계(鳳岡書?)의 전신(前身)은 소헌 선생이 1957년(丁酉)에 <봉강서계회(鳳岡書契會)>를 조직한데서 유래한다.

소헌 선생은 1956년(丙申)에 대봉언덕(鳳岡)의 봉강재(鳳岡齋)에서 '봉강서실(鳳岡書室)'을 개원했고 이듬해에 '봉강서숙(鳳岡書塾)'으로 개칭하고 서예동호인들에게 개방을 했다. 그 후 '봉강서숙(鳳岡書塾)'은 1961년에 신축한 봉강재(대봉동 12-16)로 이전되었다.

1967년(丁未)에 <봉강서계회(鳳岡書?會)>는 선생의 문하생이었던 김석환(金碩煥), 권혁택(權爀澤), 신점순(申點順)이 주동이 되어 <봉강서우회(鳳岡書友會)>로 개칭(改稱)되어 발족되었다. 문소(聞韶) 김동섭(金東燮) 선생이 '봉강서우회계첩서(鳳岡書友會契帖書)'를 짓고, 동래(東萊) 정 화(鄭 華) 선생이 '봉강서우회서(鳳岡書友會序)'를 지어서 썼다. 서우회원들이 늘고 회원들의 작품 활동이 왕성해 지면서 1968년(戊申)에 <봉강서도회(鳳岡書道會)>로 명칭을 바꾸고 정 화(鄭 華), 김동섭(金東燮) 선생을 서도회 고문으로 위촉하였다.

<봉강서도회(鳳岡書道會)> 1회전은 1968년 5월에 경북공보관 화랑에서 개최하였다(1968.5.1~5.5). 전시 작품은 벽헌(碧軒) 여상기(呂相琪), 우송(友松) 김세헌(金世憲), 소우(素愚) 김진용(金瑨鏞), 백헌(栢軒) 김 도(金 燾), 순호(舜湖) 황종성(黃鐘聲), 매헌(梅軒) 김석환(金碩煥), 소원(韶園) 이수락(李壽洛), 후암(后庵) 권오석(權五錫), 청운(靑雲) 김정규(金定奎)를 비롯한 회원 50명의 작품 93점이 출품되었고, 대구의 저명작가 소당(小堂) 김대식(金大植), 목산(牧山) 나지강(羅智綱), 학연(學淵) 문기석(文奇錫), 죽농(竹?) 서동균(徐東均), 계전(桂田) 최현주(崔賢柱), 삼우당(三友堂) 김종석(金宗錫), 희재(羲齋) 황기식(黃基植), 긍농(肯農) 임기순(任璣淳), 해봉(海峰) 이도원(李道源) 등 8인의 작품 13점이 찬조작품으로 출품하였다. 그 때까지 대구에서 볼 수 없었던 대규모 서예 전시회로 성황을 이루었다. 지역서예계의 전례없는 수확을 이룬 것이다.

창립 1회전 이후 제2회전(1969.6.11~6.15), 제3회전(1970.5.6~5.10)을 공화회관 화랑에서 개최했다. 한편 1970년에는 김진용(金瑨鏞), 김정규(金定奎), 이수락(李壽洛), 김기탁(金基卓) 주도로 <봉강서계(鳳岡書?)>가 결성(結成)된 해이기도 하다.

<봉강서도회>는 제4회전(1970.5.13~5.18,경북공보관화랑), 제5회전(1972.6.6.~6.11.대구백화점화랑), 제6회전(1973.5.22~5.27.대구백화점화랑), 제7회전(1974.4.24~4.29,대구백화점화랑), 제8회전(1975.4.16~4.21.대구백화점화랑)을 매년 개최해 왔다. 9회전(1876.4.15~4.29.대구시립도서관화랑)을 가지면서부터는 회(會)의 명칭을 <봉강연묵회(鳳岡硏墨會)>로 개칭했다.

선생은 서실 개방(1957) 후 작고(1992)할 때까지 평생 문하생들을 무료로 지도했다. <봉강연묵회>는 그동안 매월 월례회를 열고 선생의 서예 특강과 작품 품평회를 통하여 서예지도를 받았다. 인격을 함양하고 회원들 간의 상부상조하는 분위기에서 서도(書道)에 정진하여 매년 그르지 않고 회원전을 개최해 왔다. 196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대구에는 서당(書堂)다운 서실(書室)이 거의 없었다. 그 이후 하나 둘 씩 생겨나서 1970년대 후반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이른바 서예 붐이 일어난 것이다. 이같은 서예 대중화는 소헌 선생이 주재한 봉강(鳳岡)의 활동이 큰 역할을 하였다.

창립전 이후 10년을 맞은 <봉강연묵회>는 제10회전(1977.5.5~5.10.대구시립도서관)을 '영호남서예교류전'을 겸해서 개최했고, 제11회전(1978.4.29~5.5,대구시립도서관)에 이어 영호남서예교류전을 겸한 제12회전(1979.5.1~5.6.대구시민회관 대전시장)을 가졌다.

80년대에 접어들어 13회전(1980.5.1~5.6,대구시민회관 대전시장) 때부터 명칭을 <봉강연서회(鳳岡硏書會)>로 바꾸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 <봉강연서회>의 고문은 허 흡(許 洽), 서예가 김기승(金基承)이었다. 이어서 14회전(1981.5.1~5.6,대구시민회관대강당), 15회전과 제5회 영호남서예교류전(1982.7.1~7.5.대구시민회관대전시실), 16회전(1983.5.1~5.5대구시민회관대전시실), 17회전(1984.5.1.~5.5.대구시민회관대전시실), 18회전(1985.5.1.~5.5.대구시민회관대전시실), 19회전과 제7회 영호남서예교류전(1986.21~6.25.대구시민회관대전시실), 20회전(1987.5.23~5.27.대구시민회관대전시실), 21회전(1988,5.20~5.24.대구시민회관대전시실), 22회전(1989.5.20~5.24.대구시민회관대전시실)을 개최했다.

1990년대에 와서 23회전(1990.6.14~6.18), 제24회전(1991.7.14~7.17.대구시민회관대전시실)을 했고, 선생이 타계(1992.3.5)한 후에도 제25회전(1992.5.6~5.10.대구시민회관대전시실)을 개최하였다. <봉강연서회>는 매년 회원전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해서 열어 왔다.

소헌 선생 주재(主宰)의 <봉강연서회>는 그동안 회(會)의 발전에 기여한 역대 회장과 임원들의 노력도 컸다. 1968년 봉강서도회 창립전일 때에는 소헌 선생이 회(會)의 대표로 있었으나 그 후 3회전(1970)부터는 회장을 후암(后庵) 권오석(權五錫)에게 맡겼다. 1971년에 소원(韶園) 이수락(李壽洛), 1972년에 청사(靑蓑) 박선정(朴善楨), 1974년에 우송(友松) 김세헌(金世헌)이 회장을 맡았다. 1976년에 <봉강연묵회(鳳岡硏墨會)>로 개칭하고 박선정(朴善楨)이 맡았으며, 1980년에는 <봉강연서회(鳳岡硏書會)>로 개칭하고 담원(潭垣) 고의환(高義煥)이 회장을 맡았다. 이어 1983년 이후 11년 동안 청사(靑蓑) 박선정(朴善楨)이 회장을 맡아왔다. 선생 작고 2년 후인 1994년부터 소금(小錦) 우상홍(禹相洪)이 회장을 10년 동안 맡았고, 2004년부터는 약산(若山) 김영훈(金永勳) 회장이 2015년까지 12년간 맡아왔다. 2016년부터는 혜정(蕙汀) 류영희(柳永喜)가 회장을 맡았고, 2019년 이후는 회장에 경전(耕田) 박재갑(朴在甲), 부회장에 학강(學岡) 김진혁(金眞赫), 문강(文岡) 류재학(柳在學), 노정(蘆汀) 유명희(兪明姬)와 총무에 덕산(德山) 김경우(金敬祐)가 맡아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봉강서계(鳳岡書?)>는 소우(素愚) 김진용(金瑨鏞), 소원(韶園) 이수락(李壽洛), 청운(靑雲) 김정규(金定奎), 청사(靑蓑) 박선정(朴善楨), 소산(素山) 김기탁(金基卓) 제씨의 주도로 <봉강서도회(鳳岡書道會)>와는 별도로 발기되어 1970년(庚戌) 5월 23일 결성되었다. 다음은 소원 이수락의 '봉강서계서문(鳳岡書?序文)'이다.

「사람은 뜻이 맞으면 서로 모이게 되고 서로 모이면 그 자취를 남겨야 하는 것이니 옛날 회계(會稽)의 난정(蘭亭)이 역시 뜻 맞는 사람의 모임이요 천고(千古)에 그 향기를 남김이 역시 성스러운 자취의 하나이다. 이제 한국의 웅도인 대구(大邱)에서 소헌(素軒) 김만호(金萬湖) 선생이 지도하는 봉강서숙(鳳岡書塾)을 중심으로 하여 한 모임이 이루어지고 그 모임의 자취를 남기기 위하여 봉강서계(鳳岡書?)라는 계안(?案)이 이루어지니 이 어찌 성사(盛事)가 아니랴. <중 략>.

난정(蘭亭)의 성사(聖事)가 천고(千古)에 향기를 남겼다면 봉강(鳳岡)의 서계(書?)는 천인(千?)에 날개를 떨침이 되리라. 동성(同聲)에 서로 응하고 동기(同氣)에 서로 구하노니 앞으로 우리의 계(?)가 인원(人員)이 늘고 예도(藝道)가 높아져서 오랜 뒷날에 길이 자취를 남기기를 서로 원하고 서로 힘써야 할 바이다. 경술(庚戌) 첫여름 진성(眞城) 이수락(李壽洛) 적음」

1970년(庚戌) <봉강서계(鳳岡書?)> 발족 당시의 서계 입계인(入?人)은 70인이었다. 1971년(辛亥) 4월 6일에 칠곡 다부동 가산(架山)에서 첫 취합(聚合)을 하였고, '유사(有司)' 직(職)은 청사(靑蓑) 박선정(朴善楨), 소산(素山) 김기탁(金基卓)이 맡았다. 1972년(壬子) 4월 6일에 두 번째 취회(聚會)를 역시 칠곡 다부동 가산에서 가지고 도리석(都利碩) 김석환(金碩煥) 남두기(南斗基)가 유사(有司)를 이어 받았다. 1974년(甲寅)에 화원동산에서 취회(聚會)를 했고 이어서 봉강연서회 정기총회와 겸해서 매년 취회(聚會)를 이어왔다. 1974년의 유사(有司)는 이완재(李完裁) 김상은(金相殷) 전진원(全瑨元)이 맡았고, 1975년(乙卯)에 류준규(柳焌奎) 김상은(金相殷), 1981년(辛酉)에 양태지(梁泰志) 김상대(金相大), 1983년(癸亥)에 김상대(金相大) 유덕길(兪德吉), 1985년(乙丑)에 이정배(李貞培) 김상대(金相大), 1988년(戊辰)에 김영훈(金永勳) 김상대(金相大)가 유사(有司)를 이어서 맡았다. 소헌 선생 작고 이후 2004년(甲申)에 정 명(鄭 ?) 김상대(金相大)가 유사(有司)를 했고, 2013년(癸巳) 이래 현재(2019)까지 정 명(鄭 ?) 김영태(金榮泰)가 유사(有司)를 이어 오고 있다.

<봉강서계> 입계인(入?人)은 선생이 작고(1992.3.5)할 때까지 모두 590인이 입계(入?)되어 있다. 서계 발족 이후 70년대에 403인이 입계했고, 80년대에는 187인이 입계했다.

소헌 선생의 타계(他界) 이후에도 17인이 입계하여 현재(2019) 장부에 등록된 입계인(入?人)은 모두 607인이다(지면 관계로 명단 생략). 봉강서계에 입계한 120여분은 이미 유명(幽明)을 달리하였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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