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여행의 진미
겨울 여행의 진미
  • 승인 2019.12.25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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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봉조 수필가
허봉조 수필가

 

2박3일, 겨울바다를 걷는 여행을 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던 중 우연히 저가항공 사이트에 접속을 했다가 말로만 듣던 특가 항공권을 덥석 예매하게 된 것이 한 달 전쯤이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마음은 이미 그곳을 향해 쉼 없이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한 걷기를 즐기는 편이며, 올가을 희수(喜壽)를 맞이한 지인이 걷기여행에 동행하기로 했다. 날씨 예보에도 민감해졌다. 내가 가이드 겸 보호자를 자청했으니, 마냥 들떠있을 수만은 없는 형편이 아닌가. 하필이면 출발하는 날 전국적으로 추위를 몰고 오는 비가 내린다니,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은 계절이나 날씨 등 주변 환경에 따라 느낌이 다를 수 있고, 함께 가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도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우리는 같은 공부를 하는 수강생으로 또는 인생의 선후배이자 친구로서 자주 만나 밥을 먹고, 영화나 공연을 즐기며, 산책을 하면서도 서너 시간은 쉽게 보낼 수 있으니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첫날은 어둠이 내린 저녁 무렵 공항에 도착하여, 지미오름(말굽형 분화구를 지닌 화산체) 근처의 숙소가 예약된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로 향했다. 그리고 제주 특유의 밤공기로 싱그러운 호흡을 시작했다. 이튿날은 예정대로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제주의 동쪽에 위치한 섭지코지와 광치기해변, 숨비소리길과 비자림까지 자그마치 3만 보(步)에 가까운 강행군이었다.

바다가 있는 곳에서는 세찬 바람과 높은 파도가 우리를 맞이했다. 등대에서는 난간에 몸을 기대지 않고는 계단 오르내리기가 힘들었으며, 광치기해변이나 하도리 바닷가에서도 걸음을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나무로 둘러싸여 비교적 바람이 적을 것으로 예상했던 비자나무 숲길을 마지막으로 정한 것은 컨디션을 확인해가며 상황에 따라 코스를 변경 또는 축소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니의 얼굴은 호기심으로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숙소에 돌아와서도 밤늦도록 감동과 만족으로 부푼 이야기꽃을 피웠다.

돌아오는 날, 역시 맹렬한 파도가 솟구치는 바다로 갔다. 함덕해수욕장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카페의 창가에 앉아 정리의 시간을 가졌다. 처음 걷기여행에 도전한 언니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의 여행에 감회가 남다른 모양이었다. ‘좋은 사람과 자연을 벗 삼아 걷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줄 몰랐다’는 달콤한 고백과 함께 ‘나도 걸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며 가벼운 흥분으로 휩싸인 긍정의 에너지를 뿜어내기도 했다.

몸을 가누기 어려울 만큼 세차게 몰아친 바람이나 높은 파도가 아니었던들 과연 그런 감성어린 찬사가 이어졌을까 싶으니, 궂은 날씨가 고맙기도 했다. 무더운 날씨에 땀을 흘리며 걸었다면, 그렇게 짜릿한 초콜릿 같은 소감이 생겨날 수 있었을까. 특히 매 코스마다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숙소 사장님의 적극적인 배려가 없었다면 더욱 힘이 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제주의 바다를 끼고 바람과 파도를 등지거나 마주하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열여덟 소녀 같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하지만, 실상은 마음 속 깊이 지나온 시간과 다가올 새해에 대한 저마다의 생각을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미루어 두었던 일이나 실천하지 못했던 일 또는 새롭게 도전하고 싶은 미지의 일들에 대한 밑그림을 그렸다 지우기를 수차례 반복하고 있었으리라.

연말연시를 보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개인의 취향이나 주변 상황에 따라 누군가는 여행을 하고, 봉사활동을 하며, 콘서트 등을 즐기면서 막힌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버릴 것은 버리고, 지울 것은 지우며,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새해를 맞이할 푸른 꿈을 키우는 것은 어떨까.

12월 하순, 우리가 감행했던 겨울바다 여행의 진미는 새콤달콤한 맛이었다. 뒤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다음 여행을 기다리게 하는 상큼한 군침이 돈다. 그렇다. 이쯤 되면, 걷기여행이야말로 마음을 단단하게 하는 정서적 비타민이요 단백질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수많은 근육을 동시에 움직이게 함으로써 신체적 건강을 안겨준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건강관리와 함께 수시로 자신을 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많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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