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에 걸쳐 탐구한 붓글씨의 정수 ‘필진도’에 담다
일생에 걸쳐 탐구한 붓글씨의 정수 ‘필진도’에 담다
  • 김영태
  • 승인 2020.02.0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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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37) 만년기(晩年期) 2. 1990(83세)
파계사 관음전에 친필 현판
中 서예가 왕희지의 ‘도첩’ 참고
일명 ‘소헌체’ 철학 담긴 책 집필
30여년간 문하생 1천여명 배출
전국 각지서 서예원·연구소 운영
다수가 향토 핵심 서예가 활약
신년휘호하는-소헌선생
경오년(庚午,1990) 신년하례회에서 신년 휘호하는 소헌 선생(83세). 선생은 문하생들과 같이 매년 신년 휘호(揮毫)를 하고 척사(擲柶,윷놀이)대회를 함께 해왔다.
 
팔공산파계사성전암-관음전
소헌 선생이 휘호한 편액 「觀音殿(관음전),1990」과 주련(柱聯,1968)이 걸려있는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聖殿庵). 성전암의 「적묵전, 1990」과 주련도 소헌 선생의 친필이다. 소헌 선생 타계(1992)후 철웅(李哲雄)스님은 여기서 선생의 49재(四九齋) 제례를 올렸다.
 
본래무물
소헌 선생 83세 때인 경오년(庚午,1990) 중추절(仲秋節)에 휘호한 작품 「本來無物(본래무물)」,105.0x35.0cm,1990.

1990년 경오(庚午) 새해를 맞았다. 소헌 선생의 연세(年歲) 83세였다. 정월 27일(舊正)에 예년과 같이 선생의 자택에서 많은 제자들이 모인 가운데 신년 하례 모임(庚午新年賀禮會)이 있었다. 선생과 문하생들은 매년 해 왔던 신년 휘호(揮毫)를 하고 척사(擲柶,윷놀이)대회를 함께 하면서 즐거워했다. 금년은 특히 선생의 만수무강(萬壽無疆)을 기원하는 제자들의 마음이 한결 같았다.

선생은 1990년(庚午) 3월 3일에 성주(星州) 윤동(倫洞) 소재 영모암의 「永慕菴十景韻(영모암십경운)」10폭의 병풍서(屛風書)를 휘호했다. (지면관계로 내용 생략). 3월 17일에는 파계사 성전암(聖殿庵)의 「觀音殿(관음전)」과 「寂?殿(적묵전)」의 현판 글씨를 썼다. 그리고 아래의 성전암운(聖殿庵韻)을 짓고((題) 휘호를 하여 이를 인편(人便)으로 함께 보냈다.

「素軒題聖殿庵韻(소헌제성전암운)
境僻塵埃息 庵高暑氣微(경벽진애식 암고서기미)/
鳥隨鳴?下 僧追暮鐘歸(조수명경하 승추모종귀)/
移石雲生峀 寫松露滴衣(이석운생수 사농노적의)/
竹爐香茶熟 客到?巖扉(죽로향다숙 객도구암비)/
庚午三月十七日付送李會長便(경오삼월십칠일부송이회장편)

“소헌이 제(題)한 성전암 운(韻)
깊은 산골에 티끌세상이 숨쉬고 있고, 높다란 암자에는 따사로운 기운이 스며드네.
새들이 따라와 아름답게 지저귀고, 스님은 해질 무렵 종 울려 돌려 보내는구나.
돌(石) 옮겨와서 산봉오리 구름 만들고, 그림같은 소나무에 이슬방울 떨어져 옷을 적시네.
화로에 죽로차 향기 익어가니, 객(客)이 와서 바위 사립문을 두드리는구나.
1990년 3월17일, 이 회장 편으로 보냄”

83세의 소헌 선생은 그동안 숙고(熟考) 탐구(探究)해 왔던 ‘소헌필진도(素軒筆陣圖)’를 경오(庚午,1990) 단오날(端陽節)에 비로소 완성하였다. (소헌미술관 소장)

‘소헌필진도’는 선생이 한평생 연구해 온 서도(書道)의 원리, 논리의 전개와 서도(書道)에 대한 자세, 태도 등을 직접 도해(圖解)로 만든 것이다. 이는 왕희지의 ‘필진도첩(筆陣圖帖)’을 근거로 해서 창신(創新)한 소헌 선생의 도첩(圖帖)이다. 선생은 한 평생 왕희지(王羲之)를 흠모(欽慕)하고 따를려 했던 것 같다. 선생은 상주귀향전(1976년)을 마치고 한밤중에 불현득 깨친 어릴 적 서도에 입문(9세)할 때, 그의 스승인 창랑(滄浪) 김희덕(金熙德) 선생이 내려준 과제(課題)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1990년 6월에는 제23회 봉강연서회원전(회장,박선정)이 대구시민회관전시실(1990.6.14~6.18)에서 열렸다. 회원 40명의 작품 82점이 출품되었고, 소헌 선생의 격려작품 「?光同塵(화광동진)」이 전시되었다.

◇소헌삼각(素軒三覺)
1990년 초여름에 선생은 또 한번의 깨침이 있었다. 그의 비망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素軒三覺(소헌삼각)
法古今濟世之道(법고금제세지도)/ 體天地好生之心(체천지호생지심)/
庚午初夏素軒金萬湖覺(경오초하소헌김만호각)」
“고금의 법(法)은 세상을 구제하는 도(道)에 있으며, 세상 천지의 형상(體)은 삶을 좋아하는 마음(心)에 있다. 1990년 초여름에 소헌 김만호 깨침”. 소헌의 세 번째 깨침이었다.

1985년에 소헌 선생은 가톨릭 월간지인 ‘빛’ 잡지사의 취재로 「특별취재: 완성으로 가는 길목에서」 제하(題下)의 대담이 있었다. 다음은 마지막 부분의 대담 기록이다.

「<중 략>. 선생은 “사람이 한 세상을 살면서 열 번은 깨달아야 완성에 이른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만큼 깨우치는 이는 잘 없을 것 같습니다. 나도 이 나이가 되도록 삼각(三覺)에 겨우 이르렀다고나 할까. 그러니 나의 갈 길은 아직도 멀고도 먼 것이지요”라고 했다.

선생의 필체(筆體)를 두고 사람들은 소헌체(素軒體)라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서체(書體)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라며 사양한다. 취재를 하면서 기자는 오래 앉아 있을수록 그에게서 정을 느끼게 하는 온화함이 있었다.

“오늘 나를 찾아 왔으니 내가 글을 하나 주지요”. 선생은 그의 일기장에 적혀있는 글귀를 보여준다. “不然之謂大然 無理之謂至理(불연지위대연 무리지위지리)/그렇지 않다는 그것이 참으로 그렇다는 것이요, 이치가 없다는 그것이 바로 이치이다”.

봉강연서회를 뒤로 하고 나온 기자는 가을이 오는 길을 걸으며 서도의 대가(大家)가 내려준 글귀를 되내인다. “불연지위대연이요, 무리지위지리이라…”<윤은희 기자>」. (빛, 1985.10월호)

◇봉강(鳳岡)의 문하(門下)
소헌 선생이 봉강서숙(鳳岡書塾)을 개원(開院)한 해는 1961년(辛丑)이다. 개원 이래 선생이 타계(1992)할 때까지 30여년이 흐르는 동안 봉강(鳳岡)의 문하(門下)를 거쳐 간 인원은 1,000명이 훌쩍 넘는다. 소헌 선생의 문하생들은 대구·경북지역 뿐 아니라 경향(京鄕) 각지에서 후학 지도와 서예가로서의 활동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권혁택(權赫澤)은 ‘상록서예학원’, 김석환(金碩煥)은 ‘죽림서예학원’, 도리석(都利碩)은 ‘송재서예학원’, 박희동(朴熙東)은 ‘영남한림원’, 우상홍(禹相洪)은 ‘자은서예학원’, 노재환(盧在煥)의 정일서예원, 백락휘(白洛輝)의 ‘담묵서실’, 이성조(李成祚)의 공산예원, 류영희(柳永喜)의 ‘경북서예학원’, 김영훈(金永勳)의 ‘약산서예원’, 박재갑(朴在甲)의 ‘달구벌서예원’ 전진원(全瑨元)의 ‘토민서예원’ 그리고 경주의 한영구(韓永久)는 ‘심천서예원’, 영천의 박혁수(朴爀秀)는 ‘채약서예학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 밖에도 포항, 김천, 구미, 영주 등 경북지방과 부산, 울산, 마산 등의 지역에서도 서예원을 운영하고 서예활동을 하고 있으며, ‘추사체연구소’를 운영하는 김응섭(金應燮), ‘해암서예학원’을 주재하는 김재완(金載完), ‘청산서예학원’의 류준규(柳俊圭), ‘시헌문묵당’의 남두기(南斗基) 등은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편 박선정(朴善楨), 이완재(李完栽), 변정환(卞廷煥), 김기탁(金基卓), 윤임동(尹任東) 제씨는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강의 연구와 함께 서예 활동을 해 오고 있으며, 철웅(李哲雄)스님은 사찰(聖殿庵)에 은거해 있으면서도 소헌 선생 타계(他界)시까지 먼데서 사사(師事)해 왔다.

서예 개인전은 도리석, 김종식, 이성조(1966), 박희동, 한영구(1967), 우상홍(1979), 이상태, 김진혁(1980,이목화랑), 류재학(1982,이목화랑), 류영희(1984.태백화랑), 전진원(1986.태백화랑)의 첫 개인전이 있었고 90년대에 김영훈(1996,대구문화예술회관), 2000년대에 김기탁(2006), 박재갑(2013)의 개인전시회가 있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을 비롯한 각종 공모전에 입상(入賞)하는 문하생들도 늘어났다. 1966년에 권혁택(權赫澤), 김석환(金碩煥), 여상기(呂相琪), 신점순(申點順), 류영희(柳永喜) 등 회원 다섯 명이 동시에 국전(15회)에 입선하는 결실이 있었고, 1967년(16회 국전)에는 장옥분(張玉分)이 입선했다. 1970년대 이후에는 대한민국미술대전과 서예대전, 동아미전 등에서 특선, 입선의 연이은 입상으로 류영희(柳永喜), 김재완(金載完), 윤임동(尹任東), 전진원(全瑨元), 남두기(南斗基) 등의 초대작가들이 배출되었고, 대구경북의 미술대전, 서예대전에서도 박경임(朴瓊姙), 류영희(柳永喜), 김영훈(金永勳), 박재갑(朴在甲), 배원근(裵元根) 등의 많은 작가를 배출하였다. 그 외 각종 공모전에 두각을 드러낸 문하생들이 너무 많아 이루 다 열거하기가 어렵다.

이미 많은 제자들이 작고(作故)하였지만 지금(只今) 활동하고 있는 이성조(李成祚), 김영훈(金永勳), 류영희(柳永喜), 한영구(韓永久), 박재갑(朴在甲), 전진원(全瑨元), 박혁수(朴爀秀), 류재학(柳在學), 김진혁(金眞赫) 제씨 외 수 많은 제자들이 향토서예계의 핵심 인물로서 전국적인 중견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 들의 제자들 또한 서예계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이같이 소헌 선생은 항상 서예에 대한 집념 못지않게 문하생들에 대한 보살핌이 남달랐다. 이 들과는 뗄 수 없는 사제(師弟) 간의 신뢰(信賴)와 애정(愛情)으로 일관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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